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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1 07:59 수정 : 2019.12.11 10:09

한국이 경제 복잡성 지수에서 톱3에 올랐다. 픽사베이

유전적 다양성이 환경 적응력 키우듯
생산제품 복잡성이 경제의 미래 좌우
한국, 상승세 타며 ‘톱3’에 올라섰지만
다변화한 새 품목들 경제 영향력 약해
`만년 1위' 일본도 신규품목 증가 저조
중국 신규품목 수는 한국의 2배 `괄목'

한국이 경제 복잡성 지수에서 톱3에 올랐다. 픽사베이
유전적 다양성은 생물체의 환경 적응력을 높여준다. 유전형질이 다양한 생물 종일수록 환경 변화에 잘 살아남아 자손 번식의 길을 넓힌다. 이는 생물의 진화 방향을 결정하는 강력한 동력이기도 하다. 생물의 세계에서 다양성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최고의 무기 가운데 하나다. 중세와 근대 초기의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왕가에 안면기형자가 많았던 것은 근친혼이 누적되면서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진 탓이다. 생물 세계와 역사에서만 다양성 원리가 적용되는 건 아니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자 리카도 하우스만은 경제의 미래를 예측하는 데도 이 원리를 적용한다. 그는 경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복잡 다양할수록 생존 기반이 탄탄하고 미래가 유망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경제 복잡성'(Economic Complex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날수록 상품이 다양해져 경제 복잡성은 높아진다. 무역의 경우 거래 제품과 규모, 주체가 늘어나 이제는 공식 분류상 품목 수가 6000여개에 이른다.

하버드성장연구소는 하우스만의 개념을 이용해 매년 `경제 복잡성' 정도를 지수화해 순위를 매겨 발표한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이 지수를 분석한 내용을 보면 수출 품목이 다양하고, 정교하고 독창적일수록 지수가 올라간다. 여기서 독창적이라는 건 비슷한 걸 만드는 다른 나라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포럼이 소개한 하버드대 무하메드 일디림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지수를 결정하는 건 `생산적 지식'의 정도다. 생산적 지식이란 제품을 생산하는 무형의 능력을 말한다. 여기엔 지식의 집약도가 큰 영향을 끼친다. 그는 이를 문자와 단어의 관계에 빗대어 설명한다.

"생산적 지식의 각 유형을 하나의 문자라고 가정하자. 각 제품은 이 문자들로 구성된 한 단어다. 각 나라는 각각의 문자 세트를 갖고 있다. 이 문자들을 조합하면 여러 단어들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A, C, T 같은 문자로는 CAT이나 ACT 같은 단어를 만들 수 있다. 경제 복잡성 측정은 각 나라의 포트폴리오에 얼마나 다양한 문자들이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과 같다. A, E 같은 문자는 많은 단어에 쓰인다. 반면 X, Q가 들어 있는 단어는 적다. 이런 비유를 국가와 제품에 확대하면, 더 다양한 문자를 갖고 있는 나라가 더 독특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복잡성 카테고리는 이 요소들을 분해해서 정량화한 뒤 종합한 것이다. 농업이나 자연 자원을 채취하는 1차산업은 복잡성 점수가 낮은 반면 기계는 복잡성이 높다.

만년 1위 일본의 경제 복잡성 구성도. 파란색이 짙을수록 복잡성이 높은 품목이다. 오렌지색 품목들은 복잡성이 평균 이하인 것들이다.
결국 경제 복잡성 지수는 곧 그 나라의 미래 경쟁력을 가늠하는 하나의 지표인 셈이다. 수출품목을 중심으로 본 한국의 경제 복잡성은 어느 정도일까? 놀랍게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최근의 지수인 2017년 순위에서 한국은 처음으로 톱3 반열에 올라섰다. 일본, 스위스에 이어 3위다. 일본은 만년 1위 국가다. 순위를 매기기 시작한 1995년 이후 한 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고도로 정교하게 구축한 수출 경제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자동차와 전자제품이 수출 주력품이지만 다른 고부가가치 제품들도 많다. 정밀공업, 화학, 귀금속가공업 등이 주력제품인 스위스는 톱5 안에서 독일, 스웨덴 등과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한 끝에 2위에 안착했다.

한국은 22위에서 시작해 갈수록 순위가 조금씩 올라갔다. 2005년 처음으로 10위권에 진입한 뒤에도 상승세를 이어가 2017년 마침내 독일을 4위로 끌어내리고 3위에 올랐다.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복잡성이 높은 전자와 자동차다.

한국 경제의 복잡성 구성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전자, 자동차 비중이 높다.
복잡성이 높은 수출품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느냐는 경제성장을 뒷받쳐주는 동력이다. 한국은 2002년 이후 수출품목에 스마트폰, 화장품, 전기부품, 계측기기 등 23가지 제품이 추가됐다. 담배 한 가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복잡성이 중간이거나 높은 것들이다. 신규 수출품목이 8가지에 그친 일본에 비해 품목 수도 많고 복잡성도 높다. 하지만 중국(54가지)에는 크게 못미친다. 중국의 경제 복잡성 순위는 1995년 51위에서 현재 19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하버드성장연구소는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앞으로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국의 수출 신규 품목들은 2017년 1인당 소득에 511달러 기여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소득 증대를 끌어내기에는 품목 다변화 정도가 너무 약하다." 지식 집약도가 높은 신규 제품을 많이 개발하는 것이 향후 한국 경제의 미래를 탄탄하게 다지는 지름길이라는 조언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복잡성 구성도. 원유를 비롯해 온통 복잡성이 낮은 품목들이며, 품목 수도 적다.
경제력은 강하지만 경제 복잡성은 낮은 나라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나라의 최대 수출품은 광물, 농업 등 복잡성이 낮은 품목들이다. 특히 중국 경제와의 관련성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중국 GDP가 5% 떨어지면 오스트레일리아 GDP는 2.5%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단일 품목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면 나라 경제가 환경 변화에 쉽게 흔들린다. 베네수엘라가 그 사례다. 베네수엘라 수출의 4분의3은 복잡성이 낮은 원유다.

경제 복잡성 상위 10위 국가들. 세계경제포럼 웹사이트서 재인용
수출에서 원유 의존도가 57%가 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2030년 석유경제 탈피를 위해 국영석유기업 아람코를 상장하고,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1천억달러 벤처투자기금인 비전펀드에 자금을 대는 이유는 이런 취약한 단일 경제 구조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로 전환한 미국은 10위 밖으로 밀려나 12위에 머물렀다. 눈길을 끄는 것은 동유럽의 체코가 6위에 올랐다는 점이다. 체코는 최근 유럽의 생산기지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 경제 복잡성 지수 10위 국가는 싱가포르(5위), 오스트리아(7위), 핀란드(8위), 스웨덴(9위), 헝가리(10위)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곽노필의 미래창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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