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2학년 □반 ○○○의 큰누나 △△△입니다. 소개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간혹 나름의 고민과 선택으로 자신의 이름 석자만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 모인 십여명의 청년들 대부분은 자신을 누군가의 언니, 형, 동생으로 설명했다. 모르고 간 게 아니었는데도 막상 똑같은 형식의 자기소개가 이어지자, 나는 조금 먹먹해졌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그중에서도 단원고 희생자들의 형제자매들이었다. 작년, 이들은 사회적 참사의 현장을 방문하는 여행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나는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이 여행에 참여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사흘, 우리는 총 다섯번의 여행을 함께했다. 참사 초기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던 형제자매들은 바싹 마른 잎사귀처럼 바스라질 것 같았는데, 여행에서 만난 그이들은 싱그러운 청춘의 얼굴들을 하고 있어서 나는 감격했다. 하지만 그들이 짊어진 청춘의 과업은 듣기만 해도 절로 한숨이 쉬어지는 것들이었다. 누가 나에게 청춘을 줄 테니 그 과정을 다시 밟겠느냐 물으면 대번에 거절할 것이다. 대학 진학, 군 입대, 취업 준비, 실연, 그리고 부모와의 갈등까지. 그 불안하고 뜨겁고 왕성한 혼돈의 시기에, 그들은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세상의 끝을, 인간의 밑바닥을 보았다. 안산 고잔동에 벚꽃이 피면 그 잔인했던 봄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사람들. 낯선 이름의 항구, 지옥 같은 기다림, 살을 에는 바닷바람, 물에 퉁퉁 불은 시신들, 장례식장의 어린 영정, 빈소를 가득 채웠던 어린 조문객들, 쥐새끼처럼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 에스엔에스(SNS)에 퍼지던 믿을 수 없는 비난과 조롱, 그리고 온 세상의 수군거림. 세월호의 ‘세’자만 나와도 온몸이 도사려지고, 악의 없는 말에도 심장을 베이던 나날. 그리하여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이름을 한명씩 한명씩 울면서 지워 갔던 시간들. 봄은 별안간 닥쳐오지만, 그 봄을 마주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비방글을 모니터링해 고소·고발했던 한 유가족 누나에게 그 일이 어땠냐고 물었다. 그녀는 형제자매들의 모임에서도 큰누나처럼 사람들을 챙겨왔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사람이었다. “하지 않는 게 좋았어요.” 순간 가슴에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갔다. ‘안산 쓰레기 동네에 어차피 쓰레기 될 애들’. 죽은 동생을 욕하는 비수 같은 말들을 두 눈 부릅뜨고 읽어내야 했던 그녀의 봄. “누가 그런 일 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지 않는 게 좋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잘 아는 얼굴.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에 나는 늘 마음을 빼앗긴다. 작년 12월, 그 여행의 마지막에 우리는 제주도에 도착했다. 우리가 기어이 마주해야 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듯이. 희생된 언니, 오빠, 동생이 향하던 곳, 그러나 끝내 닿지 못한 땅. 가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곳, 그래서 누군가에겐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바다. 살면서 절대 마주할 자신이 없는 나의 봄이 생길 때, 나는 그 형제자매들을 생각할 것이다. 손잡고 배우고 이야기하며 떠났던 그들의 슬픈 여행을, 천천히 기어이 함께 도착했던 제주의 아름다웠던 바다를 기억할 것이다. 너무 아파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다는 이에게, 눈을 감아도 괜찮다고, 다만 네가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던 그 따뜻한 눈길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 마주해야 할 네번째 봄이 왔다.
칼럼 |
[세상 읽기] 다시 봄 마주하기 / 홍은전 |
작가·노들장애인야학 교사 2학년 □반 ○○○의 큰누나 △△△입니다. 소개는 보통 이런 식이었다. 간혹 나름의 고민과 선택으로 자신의 이름 석자만 소개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 모인 십여명의 청년들 대부분은 자신을 누군가의 언니, 형, 동생으로 설명했다. 모르고 간 게 아니었는데도 막상 똑같은 형식의 자기소개가 이어지자, 나는 조금 먹먹해졌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그중에서도 단원고 희생자들의 형제자매들이었다. 작년, 이들은 사회적 참사의 현장을 방문하는 여행 프로젝트를 기획했고, 나는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 이 여행에 참여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사흘, 우리는 총 다섯번의 여행을 함께했다. 참사 초기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던 형제자매들은 바싹 마른 잎사귀처럼 바스라질 것 같았는데, 여행에서 만난 그이들은 싱그러운 청춘의 얼굴들을 하고 있어서 나는 감격했다. 하지만 그들이 짊어진 청춘의 과업은 듣기만 해도 절로 한숨이 쉬어지는 것들이었다. 누가 나에게 청춘을 줄 테니 그 과정을 다시 밟겠느냐 물으면 대번에 거절할 것이다. 대학 진학, 군 입대, 취업 준비, 실연, 그리고 부모와의 갈등까지. 그 불안하고 뜨겁고 왕성한 혼돈의 시기에, 그들은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세상의 끝을, 인간의 밑바닥을 보았다. 안산 고잔동에 벚꽃이 피면 그 잔인했던 봄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사람들. 낯선 이름의 항구, 지옥 같은 기다림, 살을 에는 바닷바람, 물에 퉁퉁 불은 시신들, 장례식장의 어린 영정, 빈소를 가득 채웠던 어린 조문객들, 쥐새끼처럼 찰칵거리는 카메라 셔터 소리, 에스엔에스(SNS)에 퍼지던 믿을 수 없는 비난과 조롱, 그리고 온 세상의 수군거림. 세월호의 ‘세’자만 나와도 온몸이 도사려지고, 악의 없는 말에도 심장을 베이던 나날. 그리하여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이름을 한명씩 한명씩 울면서 지워 갔던 시간들. 봄은 별안간 닥쳐오지만, 그 봄을 마주하기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세월호 참사에 대한 비방글을 모니터링해 고소·고발했던 한 유가족 누나에게 그 일이 어땠냐고 물었다. 그녀는 형제자매들의 모임에서도 큰누나처럼 사람들을 챙겨왔고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사람이었다. “하지 않는 게 좋았어요.” 순간 가슴에 바람 같은 것이 지나갔다. ‘안산 쓰레기 동네에 어차피 쓰레기 될 애들’. 죽은 동생을 욕하는 비수 같은 말들을 두 눈 부릅뜨고 읽어내야 했던 그녀의 봄. “누가 그런 일 하겠다고 하면 말리고 싶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지 않는 게 좋았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잘 아는 얼굴.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에 나는 늘 마음을 빼앗긴다. 작년 12월, 그 여행의 마지막에 우리는 제주도에 도착했다. 우리가 기어이 마주해야 할 것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듯이. 희생된 언니, 오빠, 동생이 향하던 곳, 그러나 끝내 닿지 못한 땅. 가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곳, 그래서 누군가에겐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린 바다. 살면서 절대 마주할 자신이 없는 나의 봄이 생길 때, 나는 그 형제자매들을 생각할 것이다. 손잡고 배우고 이야기하며 떠났던 그들의 슬픈 여행을, 천천히 기어이 함께 도착했던 제주의 아름다웠던 바다를 기억할 것이다. 너무 아파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다는 이에게, 눈을 감아도 괜찮다고, 다만 네가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던 그 따뜻한 눈길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 마주해야 할 네번째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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