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15 04:59
수정 : 2019.04.1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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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학생 장애진씨가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산/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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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뒤 교사 꿈 접고 지난 2월 응급구조학과 졸업
2년 전 세월호 1000일 집회에서 처음 사람들 앞에서 공개 발언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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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학생 장애진씨가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산/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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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교정에는 “꺄약” “까르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록 펜스가 둘러싼 농구장에서 피구 하는 학생들이 내는 즐거운 비명이었다. 봄기운과 생기가 아울러 넘치는 그곳을 오른쪽에 두고, 이 학교 선배 장애진(22)씨가 조용히 학교 안 동산으로 향했다. 애진씨는 허리를 굽혀 화단 옆 낮은 철망에 달린 노란 리본을 쓰다듬었다. “많이 바랬네요.” 5년. 그날 이후 시간은 무심히 흘렀다. 그 사이 동산에는 2014년 4월16일 애진씨와 함께 수학여행을 가다 세상을 떠난 261명의 친구와 선생님 이름이 적힌 조형물이 세워졌다. 이름은 ‘노란 고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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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학생인 장애진씨가 12일 오전 <한겨레>와 인터뷰를 마친 뒤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를 찾아 추모 조형물 ‘노란 고래의 꿈’ 앞에 새겨진 261명의 친구 이름 옆에 서 있다. 안산/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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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5주기를 앞둔 12일 안산시에서 애진씨를 만났다. 애진씨는 지난 2월 동남보건대 응급구조학과를 졸업했다. 참사 이전 애진씨의 꿈은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응급구조사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소방서에서 응급구조사로 일하는 게 목표였어요. 그런데 경기도에서 올해는 경력자만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우선 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진로를 고민해볼 계획이에요.”
애진씨를 비롯한 생존학생들은 그날 구조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정치인이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 안 나온 것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철이 없었으면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지 않고) 다 빠져나왔겠죠. 빨리 선실 밖으로 나오라는 한 마디만 있었어도 모두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상황에서 저희는 구조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탈출한 거예요.” 구조가 아니라 탈출. 초기 대응이 잘 됐으면 모두가 탈출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은 사람의 생명을 두고 순간을 판단해야 하는 응급구조사의 길로 애진씨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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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서에서 응급구조사 실습을 하던 지난해 4월 장애진씨(가운데)의 모습. 안산소방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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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시간은 애진씨의 마음도 바꾸어놨다. 애진씨는 참사 이후 쉽게 밖을 나서지 못했다. 단원고 교복에 따라붙는 시선이 익숙하지 않았다. 정확하지도 않은 보상금 규모와 대학 특례입학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랬던 애진씨가 세월호 참사 1000일 집회 때, 처음 사람들 앞에 섰다. ‘박근혜 퇴진’의 목소리가 높았던 2017년 1월7일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 무대에 오른 애진씨는 생존학생을 대표해 이렇게 말했다.
“3년이나 지난 지금 아마 많은 분이 ‘지금쯤이라면 그래도 무뎌지지 않았을까, 이제는 괜찮지 않을까’ 싶으실 겁니다. 단호히 말씀드리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중략) 사실 그동안 우리는 당사자이지만 용기가 없어서, 지난날들처럼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숨어 있기만 했습니다. 이제는 저희도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나중에 친구들을 다시 만났을 때 ‘너희 보기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왔다’고, ‘우리와 너희를 멀리 떨어뜨려 놓았던 사람들을 다 찾아서 책임 묻고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날 무대는 애진씨의 이후 2년을 규정했다. “그전에는 뉴스 댓글들을 보면서 세월호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웠어요.” 하지만 애진씨는 무대 위에서 방패막이를 얻었다. “무대에 올라가니까 너무 많은 분이 응원하고 여전히 기억해주셨어요. 또 그날 들어보니 휴학을 하면서까지 세월호 참사를 알리는 일을 하는 대학생도 있었고, 주말을 포기해가며 활동을 하는 시민분들도 많았어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참사 5주기,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단원고 교정의 노란 리본처럼 닳아갔다. 하지만 애진씨는 쉽게 닳을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온 힘을 다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이야기한다. “저희가 기억을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당사자인 제가 먼저 진상규명이 필요한 이유를 알리고 세월호를 기억해달라고 말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잊어버리면 또 같은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날 인터뷰에 응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젠 인터뷰를 그만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기자들이 이렇게 찾아올 때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어요. 나중이 되면 더 안 찾을 것 같기도 하고…. 기자들은 항상 진실만 말한다고 하잖아요. 그래주면 좋겠고, 피해자가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자들을 먼저 찾아다니는 날은 오지 않았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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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학생 장애진씨가 12일 오전 경기도 안산시 고잔동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안산/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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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애진씨의 가장 절박한 과제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을 만드는 것이다. “국민들도 기억해야 하겠지만, 우선 국가가 먼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별수사단이 그날, 그리고 그 이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수사해 진실을 밝혀주면 좋겠어요.”
이날 단원고 교정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그날 이후 다섯 번째 핀 벚꽃이다. “벚꽃을 보면 너무 예쁘잖아요. 4월16일 그때도 벚꽃이 만개했어요. 학교 안에도 벚나무가 많아 그 밑에서 친구들하고 이야기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벚꽃을 보면 슬퍼져요.” 그 짐을 덜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그런 생각도 해봤죠.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부딪혀보려고요. 그래야 친구들한테도 덜 미안할 테니까요.”
애진씨는 다른 생존학생들과 함께 ‘메모리아’라는 모임을 꾸려 활동하는 까닭이다. 참사 4주기였던 지난해부터 세월호 엽서와 스티커 등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당사자들부터 많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세월호 진상규명에 관해서 이야기하겠지만, 다른 사회적 참사와 관련한 일이나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에도 힘을 보탤 생각이에요.”
애진씨는 인터뷰 말미 작은 꿈 하나를 털어놨다. “볼리비아에 가보고 싶어요. 우유니 호수. 아직은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애진씨의 얼굴이 봄날 햇살처럼 밝아졌다. 100억톤의 소금이 지평선을 하얗게 물들인 그곳에 언제 가볼 수 있을지 모른다. 서울과 안산을 잇는 42번 국도에 활짝 핀 벚꽃을 마음 편히 스쳐 지나갈 날도 언제일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온 힘을 다해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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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5주기를 사흘 앞둔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기억문화제 ‘기억, 오늘에 내일을 묻다’에서 장애진씨가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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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강한 무기, 젊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친구들, 선생님들, 승객들이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를 끝까지 밝혀낼 것입니다.” 인터뷰 다음 날인 13일 저녁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추모하는 기억문화제 무대에 다시 오른 애진씨가 힘줘 말했다.
안산/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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