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었다면 들을 수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 3개월째인 2014년 7월 진도 앞바다가 보이는 팽목항에는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과 멀리서 찾아오는 추모객들의 안타까운 발걸음이 이어졌다. 진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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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월호 5주기, 무엇을 할 것인가
‘그날’ 이후에도 피해자 모욕한 박근혜 정부
세월호도 천안함도…고통 방치되며 큰 상처
동정 위해 피해자답게 가만히 있으라 강요
상처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그날’ 기념해야
<꿈이었다면 들을 수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 3개월째인 2014년 7월 진도 앞바다가 보이는 팽목항에는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과 멀리서 찾아오는 추모객들의 안타까운 발걸음이 이어졌다. 진도/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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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학생,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천안함 생존장병 연구 등 한국 사회의 숱한 고통을 대면해온 사회역학자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가 세월호 5주기를 맞아 <한겨레>에 글을 보내왔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연구교수로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김 교수는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기 위해 애도해야 하고, 참사의 상처와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 기념’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월호와 노르웨이의 7월22일 언젠가 세월호 관련 강연을 하다가 “아이들을 두고 도망간 선원의 트라우마도 치료해줘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질문에 어린 분노를 알기에 쉽게 답할 수 없었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하며 우발적인 생계형 범죄가 아니라 치밀하게 계획해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죽인 재소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죗값을 치르는 동안에도 그들이 아프면 치료를 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요. 그때, 누군가가 다시 손을 들고 물었습니다. “죽은 아이가 선생님 딸이어도 그렇게 답할 수 있으신가요?” 그 먹먹한 질문 앞에서 노르웨이의 ‘7월22일’을 떠올렸습니다. 2011년 그날, 노르웨이의 북쪽 섬 우퇴위아에서 32살의 백인 남성 브레이비크는 여름캠프에 참가한 10대 청소년들에게 총을 난사했습니다. 70여명이 숨졌지요. 노르웨이 역사상 최악의 혐오 범죄로 기록된 이 참사로 브레이비크는 법정 최고형인 21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복역 중 수감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이용해 오슬로대학에 진학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받았던 ‘비인간적인 대우’에 항의하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도 내기도 했지요. 참사 이틀 뒤 당시 노르웨이 총리였던 옌스 스톨텐베르그가 했던 “(이 학살에) 더 나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인도주의로 대응하겠다”는 말은 가해자인 브레이비크에게도 적용됐습니다. 하지만 강연에서 저는 브레이비크의 사례를 말하지 못했습니다. 노르웨이의 ‘7월22일’과 한국의 ‘4월16일’은 달랐기 때문입니다. 혐오 범죄 앞에서 국가가 나아갈 길을 밝히며 국민의 아픔을 위로했던 노르웨이 정부와 달리 한국 정부는 세월호 참사의 공범이었습니다. 구조 과정에서 무능하고 무책임했던 청와대와 해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 이후 경찰청 정보국은 유가족과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제압’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국군기무사령부는 참사 직후부터 60명 규모의 팀을 운영하며 유가족을 사찰하고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했습니다. 그렇게 정부가 피해자의 고통을 모욕하는 일에 앞장선 사실을 앞에 두고 가해자의 상처와 그 치유를 논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목이 찢어져라 외쳤을 “엄마”> 인양된 세월호는 2017년 4월 목포신항에 세워졌다. 미수습자를 찾으려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끝내 5명의 실종자를 찾지 못했다. 2018년 8월29일의 모습. 목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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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방치하는 사회 ‘우리’는 어땠을까요. 자식이 죽은 이유를 알기 위해 단식하는 부모들 앞에 둘러앉아 피자를 시켜 먹으며 ‘폭식 투쟁’을 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극단적이고 저열한 행동을 일반화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손가락질하던 ‘우리’ 역시 참사 앞에 애도가 아닌 피로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억울한 고통을 겪은 뒤 이해도 치유도 받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버려진 이들이 거대한 퇴적층처럼 겹겹이 쌓여 한국 사회의 지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에서 정혜신 박사는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던 한 지인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갑자기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거나 술을 마신 소소한 일상을 수십개씩 트위터에 올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걱정되어 연락했더니 자신이 그토록 괴롭게 지낼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는데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슬퍼하는 것이 가증스럽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고통을 방치당한 자신의 과거가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시각마저도 어긋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2018년 천안함 생존장병 연구를 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동료를 잃고 트라우마로 힘겨운 생활을 이어가던 정주현 하사는 세월호 참사의 비극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세월호는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많은 사람이 아픔을 함께 나누지 않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천안함 장병들에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 생긴 고통에 국가와 사회가 모두 등 돌렸다는 사실이 가장 큰 상처였습니다. 보상은커녕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조차 하나 없는 막막한 하루하루를 버텨온 그들이 세월호 참사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그들이 지겨웠던 것은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방치하는 한국 사회였습니다. 언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의 고통을 견주고 폄하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배·보상 금액을 인용하며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사건으로 숨진 이들의 보상 규모와 견주었습니다. 나라를 지키다 숨진 젊은이나 트라우마를 겪고 살아가는 생존장병이나 전사자에 대한 보상이 충분치 않다면 잘못된 일이지요. 하지만 그 문제가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비난으로 해결될 리 없습니다. 국가와 언론이 사건의 정치적 성격을 뒤로하고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을 할 길을 찾아야 풀 수 있는 숙제이지요. 지난 8년 동안 천안함 용사 46명 가운데 한명인 고 문영욱 중사가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 생존장병 대다수가 트라우마 치료비조차 지원받지 못한 채 참담한 시간을 보내야 했던 현실에 무심했던 언론이 두 사건의 고통을 돈으로 환산해 견주는 장면은 가학적이면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피해자의 상처를 정치적으로 소비할 뿐, 그들을 위한 어떠한 현실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책맞게 운다고 놀리겠지만> 2014년 4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은 살아서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들이 공부하던 교실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2016년 5월11일. 안산/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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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할 만한 피해자가 되라는 강요 타인의 고통에 엄격한 사회에서 유가족은 착하고 비참한 피해자의 전형을 갖춰야 했습니다. 울면 운다고, 웃으면 웃는다고, 싸우면 싸운다고,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는다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습니다. 실은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인데도 말이지요. 얼마 전 출판된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에는 참사가 발생하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런 시선 때문에 고통받는 유가족의 목소리가 생생히 담겼습니다. 고 최윤민 학생의 어머니 박혜영씨는 이사를 하거나 차를 바꾼 뒤 “애들 팔아서 한 재산 챙겼다더라”라는 비난 담긴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 외국에 나가면 사람들은 “보상금 받아서 해외여행 다닌다”고 욕했지요. 비참함이 피해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폭력을 대할 때 가해자의 행동을 따져 묻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진짜 ‘피해자’인지 확인하는 데 더 큰 관심을 쏟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피해자의 말과 행동이 동정하기 적당한 모습을 벗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곤 했지요. 세월호 유가족 역시 ‘불쌍한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상규명을 외치자 비난받기 시작했습니다. 한 국회의원은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어라”라고 말했고, 사회 곳곳에서는 ‘너만 힘드냐, 그만 좀 나대라’고 핀잔했습니다. 그렇게 피해자의 입은 틀어막혔고, 몸은 매였습니다. 2016년 단원고 생존학생 연구를 진행하던 때였습니다. 살아남은 남학생들의 입대 시기가 다가오자 병무청이 부모들을 모아 설명회를 했습니다. 정작 참사 생존학생들의 입대를 어떻게 배려할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는데, 부모들은 마지막까지 모두 침묵을 지켰습니다. 답답했던 저는 입을 열지 않는 부모들에게 “특혜를 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입대 검진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으니 좀 시간을 들여 정확히 봐달라고 왜 말하지 못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한 어머니가 답했습니다. “그 말을 하면, 내일 신문에 피해자 가족이 부당한 요구를 했다고 기사로 나와요.” 그렇게 곪았던 문제가 하나씩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군에 입대한 생존학생 한명은 내무반에서 불을 끌 때마다 트라우마가 심각해져 결국 군 생활을 마치지 못하고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이 일은 3년 전 그 병역설명회 자리에서부터 예상됐지만, 누구도 말하지 못했고 결국 더 큰 상처로 돌아왔습니다.
<꿈에라도 잠깐 들러주겠니> 서울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은 지난달 철거됐다. 지난 12일 새롭게 기억·안전 전시공간 ‘기억과 빛’으로 문을 열었다. 북쪽 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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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은 참사가 남긴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기억해야 하는가입니다. 생존학생 연구에서 만났던 학생들은 한결같이 참사 초기 트라우마 치료 프로그램 때문에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의사들은 친구를 잃고 배에서 탈출한 지 채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학생들에게 수백 문항의 설문지에 응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정신건강을 알아보겠다는 명목이었습니다. 또 어떤 치료사들은 최소 몇개월이 걸리는 치유 프로그램을 4일로 압축해서 무리하게 진행했습니다. 아침에 ‘상실의 고통 치유’라는 명목으로 친구들을 잃은 상처를 상담하고 오후에는 ‘아픔에서 희망으로’라는 이름으로 트라우마를 승화하는 상담을 하는 식이었습니다. 피해자들에게 치료를 욱여넣는 이런 프로그램은 오히려 상처를 덧나게 하기도 했습니다. 생존학생들은 단원고에 머물며 언제든 필요할 때 와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던 스쿨닥터나 곁에 남아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은 뒤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며 함께했던 사회단체의 활동에 대한 고마움을 이야기합니다. 안산지역 사회복지사들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형제자매를 위한 공간 ‘우리함께’를 만들 때, 사전에 프로그램을 기획하지 않았습니다. 당사자들과 함께하며 그들이 필요한 게 있다고 요청할 때까지 기다린 뒤 프로그램을 만들었지요. 참사 뒤 세월호 피해자들에게 실제 도움이 되었던 지원 활동은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랫동안 관계를 맺고 쌓은 신뢰 위에서 진행된 것들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상처받은 피해자들과 그 비극을 목격한 우리가 그날 이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해 묻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이 비극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질문하고 있는 것이죠. 이는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라고 부르고 ‘세월호 납골당 결사반대’ 구호를 외치며 안산 안전공원을 반대했던, 사람의 가장 말초적인 욕구를 자극해 성공을 꿈꾸던 정치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대답은 명확합니다. 역사는 후퇴할 수 있고 한국 사회는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연한 사고가 아닙니다. 2014년 4월16일은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와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처럼 한국 사회의 부패와 무능이 드러난 날이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희생을 겪고도 그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바꾸지 못해 발생한 미래입니다. 언젠가 이 글을 읽는 누군가의 삶을 앗아갈, 아직은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참사의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피해자를 향한 연민을 넘어서야 하고, 슬픔과 분노를 소비하는 행위를 넘어서야 합니다. 김애란 작가는 <침묵의 미래>에서 상처받은 인간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애도해야 하고, 참사의 상처와 함께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 ‘기념’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한 304명의 생명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날로부터 5년이 지난 오늘 아침에도 차가운 바다에서 죽어간 아이의 고통을 느껴보려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받아 머리를 담가볼 한 어머니를 기억하겠습니다.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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