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16 18:18
수정 : 2019.04.16 18:57
|
16일 단원고 재학생들이 경기 안산 ‘4.16 기억교실’을 찾아 세월호 참사 단원고 희생학생들의 유품 등을 살펴보고 있다. 안산/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지난 주말 저녁 가족과 외식하러 가는 길에 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왕복 6차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오토바이 넉 대가 잇따라 보행 신호를 어기고 지나치더니, 좌우로 교차하는 차량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며 네거리를 빠져나갔다. 이들 ‘거리의 무법자’에게서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됐다. 첫째, 소형 스쿠터를 타고 있었다. 둘째, 플라스틱 배달통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 이들은 곡예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생계를 향해 각개로 사선을 돌파하는 것처럼 보였다.
짐짓 점잔을 빼는 할리데이비슨 동호회는 생계용 주행과는 애초 무관한 존재들의 집합체다. 상당수가 음식점 배달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폭주족조차 떼 지어 곡예를 펼치는 동안엔 순수 유희집단이 된다. 배달 플랫폼 노동자들만이 오직 목숨 건 각자도생의 질주를 하는데, 그 개별성이 모여 이렇듯 집단적 풍경을 이룬다. 배달 플랫폼 업체가 번성하면서 폭주족이 드물어진 것도 음식점에서 월급 받던 이들이 ‘탕뛰기’ 특수고용자로 대거 전직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때 같으면 속으로 욕 한번 하고 말 사소한 장면을 이렇게 곱씹는 걸 보니 어느덧 4월 중순인가 보다. 1년 내내 두꺼운 무의식 아래 잠들어 있던 무딘 감각 하나가 이맘때면 세시풍속 치르듯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세월호와 배달 오토바이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건 어렵고도 복잡한 일이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활성화된 내 직관은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다음과 같이 이어놓는다. ‘하늘의 별이 됐다는 아이들이 떠나간 이곳은 지금도 하루하루가 아찔한 세상이다.’
5년 전 나는 ‘잊지 않겠다’는 말을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다. 지키지 못할 다짐이 될까 봐 몸을 사렸다. 제법 오랫동안 노란 리본도 달지 않았다. 애도의 심층을 모르는 채로 감당하기엔, 상징이 너무 크고 무거워 보였다. 희생자 가족의 슬픔과 고통의 심연으로 나를 들여놓지 못했기에 분노조차 조심스러웠다. 내 고통은 고작 지끈거리는 두통이 전부였다. 몇 달이 지나서야 아스피린 삼키듯이 리본을 달았다.
내 망설임과 두려움은 ‘공범의식’과도 닿아 있었던 듯하다. 이 참극에서 나는 피해자의 위치에 오롯이 배치돼도 괜찮을까. 가해자 쪽에도 실 한올쯤 연루돼 있진 않을까. ‘우리가 세월호다’라는 말도 형식으로 보자면 ‘우리’의 위치를 명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진실의 행간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클지 모른다.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 (잠재적) 희생자일까. 대통령을 잘못 뽑은 유권자일까. 구조를 못(안) 한 해경일까. 승객을 버려두고 탈출한 비정규직 선원은 아닐까.
‘무구의 완전체’만이 진실을 요청하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도그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 웃음 짓는 피해자 가족은 다른 순간 망중한에 빠지고 훨씬 길고 자주 극심한 고통 속에 갇힐 것이다. 하늘로 간 아이들을 하나같이 ‘범생이’로 재현하는 것도 그들에겐 억압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이곳에 있었다면 스물세살 남자 혹은 여자의 어떤 모습이 됐을 그들 가운데 몇몇은 저 생계용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진실을 요청할 수 있는 것도 무구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연루된 존재’여서다. 사고 원인과 책임자를 가리고 나면, 진상 규명의 최종 심급은 내 몫의 책임을 가리는 것이 되길 바란다. 그러려면 ‘악의 완전체’를 찾으려는 욕망은 사려 깊게 경계해야 한다. 그 욕망의 끝이 음모론이다. 누군가 고의로 침몰시켰고, 또 수장시킨 게 사실이라면 참사의 본질은 ‘위장 교통사고’가 되고 말 것이다. 그 폐허 위엔 내 몫의 책임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그래서 난 음모론이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
아이들이 별에서 타전하는 메시지를 조심스레 상상해본다. ‘저는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엄마, 아빠가 덜 슬프고 덜 아프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친구들이 탐욕스러운 어른들 때문에 희생되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해요.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오토바이 타는 친구들에게 노란 리본과 산재 노동자를 애도하는 보라색 리본을 함께 달아주세요.’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