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옛 안기부) 도청 녹취록에 나오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정관계 로비와 떡값 검사 의혹 관련자가 전원 무혐의 처리되면서 한국 사회의 금권정치를 수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날아갔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도청 수사팀을 지휘한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이 2005년 12월14일 오후 삼성 엑스파일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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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 황교안, X파일 사건의 추억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공론화하고 ‘떡값 검사’라는 말을 처음 유행시킨 ‘엑스파일 사건’(국가정보원 도청 사건)은 2005년 7월22일 <문화방송>(MBC)의 단독 보도로 시작됐다. <문화방송>은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운영하던 도청팀(일명 미림팀)이 1997년 대선 무렵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이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대화한 내용을 도청한 녹취록을 입수해 보도했다. 삼성이 대선자금을 제공하고, 정·관계 인사 및 주요 보직의 검사들에게 지속적으로 ‘떡값’을 주며 관리한 정황이 담긴 녹취록은 정치권은 물론 사회각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의 고발로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황교안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 산하에 2개의 수사팀을 꾸려 수사를 진행했다. 국정원 도청 의혹은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가, 녹취록에 나오는 이건희 회장 로비 및 ‘떡값 검사’ 의혹은 공안1부가 맡았다. 이런 수사팀 구성은 큰 논란을 낳았다. 정·관계 로비 사건은 전통적으로 특수부가 맡아왔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검의 ‘정예부대’인 특수1부에 삼성 로비 의혹을 맡기지 않은 것을 두고 검찰 수뇌부의 수사 의지를 의심하는 시각이 검찰 안에서도 존재할 정도였다. 로비 의혹 수사팀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수집된 자료는 수사 및 재판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독과수(毒果樹) 이론’을 내세워 떡값 검사 수사 등에 소극적이었다. 그러자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은 같은 해 8월18일 보도자료를 통해 녹취록에 삼성 ‘떡값’을 받은 것으로 나오는 검찰 고위 간부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2005년 국정원 도청의혹 당시수사팀은 삼성관계자들의
해명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고
‘떡값 검사’는 하나도 밝히지 못해
이회성 진술 번복 인정은 그중 백미 수사대상자였던 홍석현 회장의
‘중앙일보’는 그해 올해 인물인
‘새뚝이’에 황교안 2차장을 선정
검찰 안팎서 입길, 본인도 난감
그는 한동안 ‘황새뚝’으로 불렸다 유재만 당시 특수1부장이 이끄는 도청 수사팀은 국정원의 불법감청 실태를 적나라하게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반면 공안1부가 담당한 삼성 로비 및 ‘떡값 검사’ 수사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관련자 전원을 무혐의 처리했다. 황교안 2차장은 수사결과 브리핑에서 “당사자인 홍석현과 이학수가 녹취록 내용을 전면 부인해 혐의를 입증할 수 없었다”는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2년 뒤인 2007년 김용철 전 삼성 법무실장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사건’에서 이건희 회장이 정·관계 로비를 구체적으로 지시한 삼성 내부 문건이 공개됐다. 더욱이 같은 해 11월 이용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기자회견을 자청해 삼성전자 법무팀 이아무개 상무로부터 500만원을 받았다가 돌려준 사실을 공개했다. 당시 조준웅 삼성 특검은 돈을 건넨 이 상무가 미국으로 잠적했다는 이유를 들어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지만, 이는 2년 전 노 전 의원이 공개한 내용이 상당한 신빙성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황교안 2차장의 소극적인 수사 태도는 뒷말을 낳았다. 당시 주미대사에서 막 물러나 미국에 있던 홍석현 회장을 빨리 소환하자는 수사팀 내부 의견이 있었으나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 수사팀은 당시 이건희 회장도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남-매부’ 사이에 말맞추기를 할 우려를 제기했다. 홍 회장은 2차례나 소환을 연기한 끝에 11월12일 입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황 2차장은 당시 홍 회장이 소환을 거부한 것인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소환을 어겼다고) 그렇게 말한 적 없다. 우리가 양해하고 있는 게 있다”고 답했다. 그는 또 이건희 회장에 대해서는 소환도 없이 서면조사를 결정했다. 수사팀은 이 회장 등 삼성 관계자들의 해명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특히 이회창 전 대통령 후보의 동생 이회성씨가 98년 수사 때 한 진술을 뒤집은 것을 그대로 인정한 대목이 ‘압권’이었다. 이씨가 98년 수사 때 삼성 쪽에서 60억원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을 30억원으로 번복한 것에 대해 “그때는 피곤한 상태에서 진술했고, 법정에서도 공소사실과 관계가 없어서 그냥 인정했다고 한다”며 이씨를 ‘변론’했다. 이씨가 검찰은 물론 법정에서 한 진술까지 바꿨는데도 이를 추궁하기는커녕 친절하게 대신 해명해줬다. 이는 명백한 이건희 회장 봐주기였다. 이회성씨가 받은 돈이 60억원으로 인정되면 이건희 회장의 공소시효가 10년(50억원 이상 뇌물을 제공할 경우)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엑스파일 수사결과 발표 직후 삼성 관련 의혹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을 꼬집어 ‘삼성 봐주기 수사’로 일제히 비판했다. 단 하나, 예외는 있었다. 홍석현 회장이 운영하는 <중앙일보>는 황교안 2차장을 그해의 올해의 인물로 꼽았다. <중앙일보>는 각 분야에서 올해의 인물들을 뽑아 남사당놀이 용어인 ‘새뚝이’라 불렀다. 새뚝이는 남사당놀이에서 새 막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발상으로 미래를 개척해 앞날에 대한 희망을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게 <중앙일보>의 해설이었다. 신문은 “법에 따라 원칙대로 수사하면 숨어 있는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자신한다”는 황교안 2차장의 ‘출사표’도 소개했다. <중앙일보>의 ‘새뚝이’ 기사는 검찰 안팎에서 두고두고 입길에 올랐다. 황 차장의 새뚝이 선정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검사들도 꽤 있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에서 일하던 한 검사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자기 회사의 사주가 관련된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된 것이 매우 다행스럽겠지만, 그래도 너무 속보인다”고 꼬집었다. 또다른 검사도 “가뜩이나 여론의 시선이 곱지 않은데, 이번 일로 검찰이 더욱 곤란하게 됐다”며 “새뚝이로 선정된 당사자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황교안 차장도 <중앙일보> 기사에 난감해했다는 말도 나왔다. 검찰 기자들 사이에서 그는 한동안 ‘황새뚝’으로 불려야 했다. 이춘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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