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승민 의원이 지난 8일 사퇴 기자회견 직전 회견장으로 가기 위해 국회 의원회관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모습. 사진 공동취재단
|
[토요판] 커버스토리/유승민을 말한다
개혁보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새누리당 의원 유승민을 말한다
지난 13일 동안 압축적으로 펼쳐진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사이의 권력다툼은 사실상 유 전 대표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통령은 뜻하는 바를 이뤘지만 국민의 지지를 잃었고, 유 전 대표는 직을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156일 만에 원내대표직을 사퇴한 유 전 대표는 단번에 김무성 당 대표를 따돌리고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떠올랐다. 유 전 대표의 치솟는 인기는 야권 지지층에까지 확장됐다. 복지보단 성장을 우선시하는 시장주의자이며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도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안보 보수주의자인 유승민을 야권 지지층까지 응원하는 지금의 현상은, 그만큼 한국 보수 정치계에 대화가 통하는 합리적 인물이 희소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우여곡절 끝에 정치인 유승민은 더욱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인물이 돼 버렸다. 유 전 대표의 어린 시절부터, 정치권에 발을 들인 이후 행보와 박 대통령과의 관계까지 짧은 시간 동안 가능한 그의 모든 것을 들여다봤다.
샌님? 쾌남? 보수주의 경제학자 출신의 반란
▶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13일 동안 청와대의 사퇴 압력을 이겨낸 과정에서 사람들은 유승민이란 정치인을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대중의 주목을 이토록 크게 받은 적이 없는 정치인이었습니다. 짧은 시간 한국 보수의 희망으로 떠오른 유승민은 어떤 정치인일까요? 그의 측근과 가족, 친구들, 지역구인 대구 동구을 등을 찾아 인간 유승민과 정치인 유승민을 복기해봤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토록 오래 버텼을까. 국회법 개정안을 국회로 돌려보낸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여당의 원내 사령탑도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협조를 했는지 의문이 간다”며 유승민(57)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이하 유승민)를 지목해 공개 비난했다. 다음날 바로 90도로 허리를 굽힌 유승민은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사죄했지만, 그의 납작 엎드린 듯한 사과는 뭔가 개운치 않았다. 도리어 유승민은 “(대통령이 언급한) 경제활성화법 30개 중 23개가 처리됐고 2개는 처리 예정이었다”며 “마음을 풀고 마음을 열어달라”고 주문했다. 듣는 이를 ‘옹졸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답이었다. ‘이미 해달라는 대로 해줬다. 문제는 당신이 속이 좁아 그런 것이니 이만 속을 풀라’는 것이다. 어쩌면 유승민은 이때 이미 대통령의 불신임을 오래도록 버텨내겠다고 예고했는지 모른다. 그는 결국 이 상황을 13일 동안 끌었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며 사실상 대통령의 언행이 헌법을 무시한 제왕적 행태라 일갈한 뒤 무대에서 사라졌다. 유승민은 단숨에 차기 대권주자로 뛰어올랐다.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율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고도로 계산된 정치적 행보”라는 비판부터 “여권이 개혁적 보수와 수구 보수로 나뉘는 단초를 만들었다”는 지지까지 나온다. 유승민과 대통령의 대립은 향후 한국 정치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 일로 기록될까. 그러자면, 정치인 유승민을 조금 더 길고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전례 없이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집권 여당의 ‘개혁적 보수’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가 8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원내대표직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유 전 대표는 이날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해 사실상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한 제왕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이전부터 묵혀둔 구원 터져나온 것
헌법 언급한 유승민 기자회견은
대통령을 향한 선전포고 같았다
유승민에 관해 좀 더 알아보자 어린 시절 집안 좋았지만 살림 빠듯
중이염 앓는 아들의 병원비 위해
엄마가 암표 팔다 경찰조사 받기도
중고교땐 공부 잘하면서 소탈
퇴학당한 친구들도 잘 챙겨 친척까지 총동원된 아버지의 선거
|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약력
|
|
사진으로 보는 유승민
|
김대중 정부 때 KDI 내부서 갈등
98년 클린턴 방한 원탁토론 때도
정부정책 날선 비판으로 시끌시끌
2000년 한나라당 싱크탱크로 옮겨 2004년부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원조 친박’ 진용 직접 짜기도
2011년 12월부터 박근혜와 균열
‘박근혜 비대위’ 위해 최고위원직
내던졌지만 이후 계속 소외당해 박근혜의 배신 당시 이명박이 아닌 박근혜를 선택한 유승민과 원조 친박들의 생각은 복잡하지 않았다. 정권의 탈환을 위해 2강 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이명박은 전과자에다 부패한 인물이었다. 둘뿐인 선택지에서 “최악을 피해 차악을 택한 것”이다. 유승민과 함께 원조 친박 그룹에 속했던 한 여당 인사는 “이명박 전 대통령께 죄송하지만 당시 그는 부패한 게 너무 많았다. 철학과 가치가 실종된 분으로 여겨졌다. 국가 운영이 비즈니스가 아닌 바에야, 대한민국이 그리 갈 순 없다고 봤다”고 했다. 반면 박근혜는 사심이 없어 보였다. 애국심도 있었다. 여성이기도 했다. 그는 “본인의 가치관이나 철학, 양심 등이 괜찮으면 나머지 전문적인 부분은 우리 테크노크라트가 채울 수 있다고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2007년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이후 한나라당 내 친박 그룹은 혼란스런 시기를 보냈다. 유승민도 이때부터 조금씩 박근혜에 대한 공개비판과 소신발언을 해나갔다. 나중의 일이지만 “2008년 금융위기 뒤 재정적자가 치솟는 것을 보고 (‘줄푸세’ 중) 감세 주장을 접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2009년 4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0 대 5로 참패한 뒤 친이계가 친박계와 화합을 시도하며 새 원내대표를 친박계로 추대하려는 과정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었다. 박근혜는 애초 친이계가 제안한 ‘김무성 원내대표 카드’는 강경히 반대해놓고, 별다른 이유 없이 ‘황우여 원내대표와 최경환 정책위원장 카드’는 받겠다고 한 것이다. 불분명한 원칙에 친박계의 내부 결속이 무너졌고 당사자였던 김무성은 ‘탈박’을 선언했다. 이어 언론관련법이나 세종시특별법 등을 둘러싼 논란을 두고 “박 전 대표의 원칙이 뭔지 모르겠다”, “소통이 안 된다”는 회의와 불만이 터져 나왔다. 2010년 8월엔 박근혜의 당대표 재임 시기 ‘1호 비서실장’이었던 진영(전 보건복지부 장관)마저 친박계를 이탈했다. 유승민의 경우 박근혜와 본격적으로 갈라서기 시작한 계기가 2011년 12월에 찾아왔다. 유승민에겐 그해 7월4일에 치러진 전당대회가 매우 의미있는 기억이다. 정치권 입문 뒤 두번의 큰 패배를 맛보며 일종의 정치적 유배기를 보낸 유승민은 이 전당대회에서 다소 파격적인 ‘용감한 개혁’을 내세웠고, 당대표가 된 홍준표에 이어 2위 득표로 최고위원이 됐다. 유승민의 한 측근은 “공천권을 한꺼번에 쥔 2등 최고위원이었다. 본인으로선 정치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누가 그걸, 어느 바보가 던지고 싶었겠나”라고 했다. 유승민은 그러나 4개월 뒤 최고위원직을 사퇴했다. 당시는 정치인이 아니었던 박원순이 서울시장에 당선되고, 역시 정치인이 아니었던 안철수가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던 때였다. 박근혜는 안철수에게 10% 이상 지지율이 밀리고 있었다. 정권 재창출의 꿈은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박근혜가 다시 당의 구원투수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선거의 여왕’ 이미지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당을 살릴 구원투수를 내세워 넉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이기고 연말 대선도 이겨야 했다. 유승민은 사퇴 직전 이런 계획을 박근혜와 상의했다. 다음날 친박들의 만류에도 남경필, 원희룡을 설득해 가장 먼저 최고위원회를 나와 홍준표 체제를 무너뜨렸다. 이후 박근혜는 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됐고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새누리당으로 이름을 바꾼 한나라당은 2012년 4월 총선에서 과반인 152석을 가져갔고 그해 12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비대위의 공천심사위원장은 최경환 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부위원장은 정종섭 현 행정자치부 장관이었다. 유승민은 총선 대선 과정에서 아무런 직함도 맡지 못했다. 오히려 유승민과 가까운 이들이 공천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유승민의 한 측근은 “박근혜 비대위 체제에서 최경환, 유정복, 서병수 세 사람이 공천의 전권을 쥐었다. 자신을 위해 살신성인한 유승민에겐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고, 오히려 공천에서 탈락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황제가 보기엔 노예들끼리의 싸움은 별 관심 없고 의미 없는 일이다. 박근혜는 노예 중에서도 ‘입안의 혀’처럼 굴고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노예만을 별생각 없이 쓰는 것”이라 했다. 유승민은 대안인가 이후 둘의 관계는 우리가 최근 집중적으로 보고 들어왔던 것과 같다. 유승민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청와대 알라들” 발언으로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렸고, 올해 2월 원내대표가 된 뒤 정부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해왔다. 대통령의 작심한 듯한 국무회의 발언은 이전부터 묵혀둔 구원이 터져 나온 것에 불과하다. 사퇴 기자회견에서 유승민이 헌법 1조 1항을 언급한 것은 대통령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전임 이명박 전 대통령과 세종시 문제를 두고 각을 세워 지지율을 끌어올린 것처럼, 유승민은 현직 대통령에 맞서고 있다. 일련의 사태 뒤 유승민은 실제로 김무성 당대표를 제치고 여권 내 지지율 1위(10일 리얼미터 조사)로 급부상했다. 복지보단 성장을 우선시하는 시장주의자에,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 도입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안보 보수주의자인 유승민을 야권 지지자들도 응원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태인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유승민은 합리적인 인물이지만 기본적으론 보수주의 경제학자다. 여권 내에서 ‘중부담, 중복지’가 나온 것은 분명 발전이지만, 이때의 증세는 복지보단 재정건전성 때문에 나온 얘기로 복지보다 성장을 우선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국가가 빚을 많이 져선 안 된다는 논리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등 현 시기에 필요한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이해는 편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새누리당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유승민은 지금 이 시기 어떤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침묵하고 있다. <한겨레>가 10일 유승민 의원실을 통해 원내대표직 사퇴 이후 계획, 박 대통령에 대한 견해, 본인의 정책 등에 대해 두루 물었으나 유 전 대표는 “현재의 정국 상황을 고려할 때 별도로 언론을 통해 발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했다. 그나마 단초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유승민과 가까운 이들이 지금의 집권 여당을 내부 개혁조차 어려운,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그의 한 측근은 “소신있는 이들은 국회의원 자리를 주지 않는다는 게 지난 총선의 공천 기준이었다. 개혁은 사람이 해야 하는데, 지금 새누리당 내부엔 사람이 없다. 다 대통령에 굴종하는 새가슴 아니면 부패한 이들뿐이다. 외생적 변수에 의해 개혁되는 방법밖에 없다. 결국 다음 총선을 전후해 여러 변화와 격동이 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린 지금 집권 여당에서부터 시작될 거대한 정계개편 드라마의 예고편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기용 고나무 허재현 기자 xeno@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