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386 참모가 쓴 ‘청와대 비망록’ 공개돼
참여정부 1기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한 한 386 참모의 '비망록'이 공개됐다. 청와대 제1부속실에서 노 대통령을 최근접 수행했던 이 진(여) 전 행정관이 쓴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 노무현 왜 그러는 걸까'라는 책은 대선 전후 시점부터 지난해 탄핵사태 전까지 노 대통령을 중심으로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졌던 참여정부 초기의 비사들을 시간대별로 서술하고 있다. 재임중인 현직 대통령의 정치행위와 정책결정 과정 등이 청와대가 아닌 전직 참모에 의해 공개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저자인 이씨는 "노 대통령이라는 섬과 국민이라는 육지 사이에 다리를 놓아봄으로써 섬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이런 집필 의도를 반영하듯 이씨의 눈에 비친 노 대통령은 상식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과거식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탈권위'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다음은 비망록 중 일부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미리 다 털고 가자" 노 대통령은 지난 대선 직후 측근비리 및 정치자금 의혹의 전모를 밝히기로 하고, 2003년 4월 국회에서의 첫 국정연설에서 이를 공개한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참모들의 만류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고 이씨는 기록했다.이씨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대선 이틀 후인 12월 21일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가면서 안희정, 이광재(光)씨도 별도로 불러 "국민 앞에 털어야 할 것이 있다면 미리 다 털고 가자"며 대국민 고해성사를 제안했다는 것. 이에 따라 안씨는 1월 둘째주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자금의 전모를 밝힌 뒤 검찰에 자진 출두한다는 계획을 정했으나 이런 결심을 접한 '386 동지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기자회견 이틀 전에 결심을 접었다. 노 대통령도 3월14일 법무무 업무보고 자리에서 검찰에 나라종금 사건에 대한 성역 없는 수사를 당부하고, 3월18일 저녁에는 안씨를 관저로 불러 국정연설을 통해 나라종금 사건의 전말과 함께 대선 때 사용한 선거자금 내역도 전부 공개하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참모들의 만류로 결국 공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안씨에게 불출마 권유하고 눈물" 노 대통령은 2003년 7월13일 안씨를 관저로 불러 총선 출마를 포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뜻밖의 제의를 했다고 이씨는 밝혔다. 노 대통령은 당시 청와대에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이호철, 이광재씨도 동석한 만찬 자리에서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함께 끝을 내면 좋겠다"며 안씨의 손을 꽉 잡았다는 것. 순간 노 대통령의 눈에선 눈물이 핑 돌았고, 안씨는 목청을 가다듬은 뒤 "너무 걱정하시 마십시오. 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씨는 결국 고향인 충남 논산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2003년 12월 불법 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정치의 꿈을 접어야 했다. 이호철, 대통령 면전서 "최도술 사표내라"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2003년 8월 사표를 내며 정치적 동지였던 노 대통령 곁을 떠나게 된 것은 이호철 현 국정상황실장의 요구가 직접적 계기가 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1년 후배로 노 대통령의 변호사 사무장을 지내 '영원한 집사'라고 불리던 인물이다. 당시 민정비서관이었던 이 실장은 이런 최씨의 SK 정치자금 수수혐의를 포착하고는 8월11일 대전 휴가에서 돌아온 노 대통령과 문재인 민정수석이 함께 한 만찬 석상에서 최씨에게 사표를 내라고 요구했다는 것. "전 청와대비서관과 현 비서관의 직위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이실장의 자진 사퇴 요구에 얼굴이 창백해진 최 비서관이 황깠 자리를 뜨자 이 실장은 관저 문앞까지 쫓아가 "형님.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이씨는 전했다. "대통령 재신임 발표 막아라" 노 대통령이 최도술 SK자금 수수 등 잇따른 측근비리 의혹과 관련해 2003년 10일10일 국민에 재신을 묻겠다는 입장을 발표하기 직전까지 참모들의 완강한 반대와 맞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가 진척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반기문 외교보좌관), "꾹 참고 계시는 게 낫다"(김희상 국방보좌관), "시기상조다"(문재인 민정수석)라는 것이 참모진의 전반적 의견이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특히 한 측근 참모는 노 대통령을 기자회견을 하러 청와대 춘추관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자 부속실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막아요. 춘추관 못 가게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막아요"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안대희에게 아주 제대로 걸렸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초 검찰이 정치자금 수사를 10대 재벌기업으로 확대했다는 보고를 받고 "잘 하는 것이다. 검사가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당시 대선자금 수사를 지휘하던 안대희 대검중수부장의 성역 없는 수사 방식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이씨는 기록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사시 동기생들과의 모임에서 "안대희씨가 원칙대로 파헤치는 검사라는 이야기만 듣고 있었는데 이번에 내가 아주 제대로 걸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10월25일 안희정씨를 관저로 불러 "검찰이 앞으로 재벌들에 대한 조사까지 전부 할 것인데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안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습니다. 전부 까십시오"라며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보였다. "니 당장 그만둬라" 친인척에 엄격 노 대통령은 조카가 어떤 기업으로부터 CEO 자리와 함께 거액의 주식 옵션을 제안받았다는 내용의 민정수석실 보고서를 보고 진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당장 그 자리에서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니 당장 그만둬라"며 30분동안 호통을 쳤고, 민정수석실에도 "조카를 영입한 회사 사장을 만나 제안을 철회하도록 하고, 안된다 하면 앞으로 특혜 관련 조사를 계속 하겠다고 하라. 그래도 안되면 사전 보도자료를 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밝혀버려라"고 지시했다고 이씨는 밝혔다. 노 대통령은 또 2004년 2월초 이른바 친형 건평씨의 처남인 민경찬씨의 펀드모금 파문이 불거지자 민정수석실에 전화를 걸어 "민경찬이 도대체 왜 그러는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러는지 좀 알아보라"고 소리쳤다. 이런 노 대통령 때문에 민정수석실의 관리대상인 900여명의 친인척들의 불만이 적잖았는데, 어떤 이는 "옛날 민정수석실은 친인척들 취직도 시켜주고 도와줬다는데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드리냐"고 소리를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건평씨의 경우 노 대통령에게 몇 차례에 걸쳐 "대옳설 남상국 사장을 유임시켜달라"고 부탁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노 대통령은 나중에 검찰조사 결과 건평씨가 남 전 사장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것으로 밝혀지자 불같이 화를 낸 뒤 민정수석실에 "절대로 유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특별지시를 내렸다. "자네들은 참 이상한 놈들이야" 철저한 친인척 관리로 노 대통령의 격려를 받은 민정수석실은 2003년 8월 청주 나이트클럽 향응파문으로 물러났던 양길승 전 제1부속실장 사건 당시 알맹이가 부족한 보고를 올렸다가 호된 질책을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첫 보고 때 양 실장이 저지른 부적절한 처신의 '구체적 내용'을 보고하지 않은 것이 뒤늦게 문제가 되자 노 대통령이 "자네들은 참 이상한 놈들이야. 날 잘 알잖아. 내 성격을. 그러면 판단 자료를 잘 조사해서 보고했어야지. 그런 자료도 안주고 나한테 (양실장 거취) 판단을 하라고 했던 건가. 너희들은 뭐한다고 거기 가 있는 거야"라고 언성을 높였다는 것. 노 대통령은 이호철 민정비서관이 "이번 기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싶다"고 밝히자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하는가"라고 반문한뒤 "부속실장이면 칼 같이 잘랐어야지"라고 말했다고 이씨는 밝혔다. "밀가루 뒤집어쓴 기분" 노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는데도 불구하고 "어디 내가 죽나"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이씨는 밝혔다. 노 대통령은 특히 대통령 직무정지에 따라 본관을 나서는 순간에도 웃음을 지어보였고, 직원들의 눈물바다를 이룬 관저로 들어서면서 "밀가루를 뒤집어쓴 기분이로군"이라는 혼잣말을 하며 빙긋 웃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앞서 탄핵안 가결 직후 소집된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탄핵이야말로 총선용 정치이지만 자충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 10분만에 회의를 마쳤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또 4.15 총선 당일 출구조사 결과 대구에 출마한 이강철 후보의 낙선이 확실시되자 "대구에서 35% 받으면 영웅인 겁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됐다. "총선서 여당 지면 정권 넘기려고 했다" 노 대통령은 탄핵안이 현실화된 시점에서 ▲탄핵을 받았을 경우와 받지 않았을 경우 ▲총선에서 승리했을 경우와 실패했을 경우의 수에 대한 개별적 상황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고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당시 참모진을 불러놓고 "총선에서 국민이 이대로 가라 하면 제도적 마무리를 하는 것"이라며 "국회에서 탄핵 결의를 한다면 받아놓고 건곤일척 하자"고 말했다는 것. 노 대통령은 특히 여당 패배시 "총리 주도의 동거정부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야당에 대한 파격적인 양보를 전제로 하는 실질적 총리책임제를 구상중이었다고 이씨는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에 따라 야당과 일부 언론에서 요구했던 선거개입 발언에 대한 '대국민사과' 카드를 접었으며, 결국 총선은 여당에 과반수 승리를 안겨줬다. 노 대통령은 특히 자신이 갖고 있던 복안을 총선 직후 참모들에게 공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나는 총선 결과를 재신임으로 받아들인다.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넘기면 그대로 가고, 못 넘기면 원내 연합세력에게 실질적 정권을 넘긴다는 것이었다"고 말했으며, 당시 이병완 홍보수석은 "국민이 탄핵 심판을 해버린 것이다. 이제 누가 재신임을 이야기 하면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소리 듣게 된다"며 상황을 정리했다. "굿모닝이라고 할 수 없고..." 2003년 3월10일에 있었던 조지 부시 대통령과의 첫 전화큼 내용 등 이라크전과 북핵문제를 둘러싼 한미간의 긴박했던 상황도 이번에 공개됐다. 오전 9시쯤 청와대로 전화를 건 부시 대통령은 "2시간후 이라크를 공격할 것이다. 지지를 요청한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노 대통령은 "귀국의 군사적 결단이 조속히 마무리되기를 바란다"며 "(4월18일) 체니 부통령이 방한할 때에는 이라크가 아니라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짧은 큼를 마친 노 대통령은 "나는 아침인데 이 양반은 '굿나잇'이라고 하네. '굿모닝'이라고 할 수도 없고..."라는 싱거운 농담을 던졌는데, 같은 날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결국 상대방의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고 이씨는 밝혔다. 노 대통령은 미국의 대북 선제공격설과 관련, "한국 대통령의 동의 없이 공격을 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매우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다. 한국 국민의 안전은 우방과의 동맹보다 더 중요하다. 나쁜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이를 들은 레이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또 4월4일 오전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북핵문제와 관련해 "북.중.미 3자회담이 열리게 된다"는 통보를 받고 "한국 처지가 안팎 곱사등이라더니 어찌하겠습니가. 안고 가야지"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이씨는 회고했다. 김우식, 택시기사 쌍욕까지 전해 이씨는 참여정부 1기 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의 '코드 문제'도 소개했다. 이씨는 우선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을 정치 분야에서 노 대통령과 눌가 통한 인물로 기억했으며, 조윤제 경제보좌관에 대해서는 노 대통령이 "조 보좌관이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이 내가 바라던 역할과 일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이씨는 또 김희상 국방보좌관은 노 대통령의 뜻에 직설적으로 반대의견을 개진하는 '꼬장꼬장한 군인'으로 묘사했고, 반기문 외교보좌관에 대해선 노 대통령이 "반 보좌관 하고 있으면 서당에서 글 배우는 느낌이 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박주현 국민참여수석의 경우 시민사회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때로 노 대통령으로부터 "시민단체 이야기를 청와대가 그대로 흡수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으며, 정찬용 인사수석은 완전한 인사 자율권을 행사하면서도 "나는 호남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며 호남 민심을 전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총선 전 문 실장으로부터 바통을 건네 받은 김우식 비서실장에 대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할 정도의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다"고 말했다. 한번은 김 실장이 택시기사들의 쌍욕까지 그대로 전하자 노 대통령이 "실장님은 왜 그런 이야기를 제게 자꾸 하십니까"라며 역정을 냈으나 김 실장은 "대통령이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것 때문 아니냐"며 그 후로도 계속 노 대통령에게 '험담'을 했다고 이씨는 밝혔다. 그는 "참여정부는 코드인사 비난을 수없이 받아왔지만 실제 구성 인원들의 출신과 성향은 다양했다"고 말했다. 김재현 기자 jahn@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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