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대통령 취임식 뒤 카퍼레이드를 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22일 새벽 0시22분에 서거했다. 연합뉴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국가장’으로 26일 영결식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문민 대통령’ 시대를 열었고, 퇴임 뒤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 비판도 주저하지 않던 그였지만, 세월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지난 19일 고열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22일 0시22분 서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반세기 동안 ‘양김시대’를 이끌며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이뤄온 대한민국 14대 대통령(1993~1998)은 차남 현철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욕의 88년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 ‘문민 대통령’ 시대를 열었고, 퇴임 뒤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근혜 대통령(예비후보) 비판도 주저하지 않던 그였지만, 세월마저 이겨내지는 못했다. 지난 19일 고열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22일 0시22분 서거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반세기 동안 ‘양김 시대’를 이끌며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이뤄온 대한민국 14대 대통령(1993~1998)은 차남 현철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욕의 88년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임시국무회의를 열어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첫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의결했다. 장례위원장은 황교안 총리가 맡았다. 영결식은 26일 오후 2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다. 말레이시아를 방문 중인 박근혜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부는 관련법과 유족들의 뜻을 살펴 예우를 갖춰 장례를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의 묘소는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의 장군제3묘역 오른쪽 능선에 마련될 예정이다.
질곡의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섰던 김 전 대통령은 그만큼 영욕과 명암이 교차하는 발자취를 남겼다. ‘거산’(巨山)이라는 호처럼, 그는 한국 민주화의 큰 산이었다. 1954년 자유당 후보로 최연소(27살)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1960년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 민주화 투쟁의 주축으로 나섰다. 1970년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신민당 대선 후보 도전에 나서는 등 박정희 정권과 맞서다 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되는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된 부마항쟁을 부른 것도 ‘김영삼 의원직 제명’ 사건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서도 1983년 민주화 5개항 수용과 야당 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다 가택연금됐다. 당시 23일간의 단식투쟁은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돼,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93년 군부통치를 종식하고 ‘문민 대통령’이 된 뒤에는 자신의 재산 공개를 시작으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제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들을 이뤄냈다. 검은돈을 차단하기 위한 금융실명제, 군 사조직인 ‘하나회’ 척결, 고위공직자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작업도 진행했다. 비자금 축재와 군사쿠데타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는 등 ‘역사 바로세우기’도 밀어붙였다.
22일 김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도 여야를 떠나 한목소리로 김 전 대통령을 “민주화의 큰 별”로 추어올리며 그의 업적들을 되새겼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에 합류하며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상도동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그는 최초의 문민 정부를 여신 대통령이었고, 대통령 재임 중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 위대한 개혁 업적을 만드신 불세출의 영웅”이라고 회고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 김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신과 철학을 우리가 다시 기리고 계승할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의 ‘공’만큼이나 ‘과’가 드리운 그늘도 짙다. 김 전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대표 시절인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여 3당 합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에 동참했다. 자신의 투쟁 대상이던 독재세력과 손잡는 동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호남을 고립시키는 한국 정치의 퇴행을 주도한 것이다. 그때 만들어진 영남·보수 패권주의 구도는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대통령 재임 후반부에는 차남 현철씨의 국정 개입과 한보 비리 연루,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 등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가 터져나왔고, 경제정책에서도 무리한 민영화와 세계화 등으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해 최악의 성적을 남겼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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