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연말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관심법안을 처리하라며 정의화 국회의장을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직권상정이라도 해서 빨리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했죠. 정의화 국회의장은 “국회(선진화)법이 바뀌지 않는 한 할 수 없다”고 맞받았습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에서 불만이 터져나옵니다. “그놈의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라고. 선진화라는 말은 새누리당에서 좋아하는 말인데 왜 유독 국회‘선진화법’만 싫어하는 걸까요?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박근혜 대통령은 그렇게 국회선진화법에 이를 바득바득 가는 걸까요? 정치BAR에서 국회선진화법의 실체를 파헤쳐 봤습니다.
다수결의 원칙, 그리고 몸싸움
국회선진화법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과 행정부가 법률안을 낼 수 있습니다. 법률안의 ‘발의’라고 합니다. 이렇게 국회에 새로운 법률안이나 법률 개정안이 ‘발의’되면 소관 상임위원회로 넘겨집니다. 환경과 관련된 법안은 환경노동위원회, 국방과 관련된 법안은 국방위원회가 심사를 맡는 것이죠. 상임위 심사를 통과하면 법률안은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로 넘어가 체계·자구 심사를 거치게 됩니다. 소관 상임위에서 올라온 법률안이 헌법이나 다른 법률과 충돌하는 부분이 없는지, 법률 문구의 표현이 중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없는지 등을 살피게 되죠. 그래서 법사위를 ‘상원 상임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법사위 심사가 마무리되면 법률안은 본회의에 올라갑니다. 재적의원 과반수가 출석한 상태에서 출석의원 과반수가 찬성하면 법률‘안’은 이제 법률이 됩니다. 국회는 이렇게 통과된 법률을 대통령에게 보내게 되는데요, 대통령은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법을 집행해야 하는 행정부 수반에게 부여한 권능이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은 다시 국회로 돌아오는데 국회 본회의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 의결하면 법률로서 확정됩니다. 여기까지가 간략하게 정리한 법률 제·개정 절차입니다.
법률 제·개정 절차를 관통하는 기본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면 어떤 법안도 통과시킬 수 있는 것이죠. 과반의석을 가진 정당이 의석 수로 밀어붙이면 소수당은 ‘악법’의 통과를 ‘합법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힘도 없고 권한도 없는 소수당으로서는 몸으로 때울 수밖에요. 그래서 상임위 문을 걸어잠그거나, 본회의 사회권을 가진 국회의장을 감금하거나, 본회의 의장석을 점거하거나 이런 식이었죠. 의석을 앞세운 다수당의 법안 강행 처리는 소수당 입장에서는 날치기가 됩니다. 그럴 때마다 국회 안에서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했습니다.
2010년 12월8일 한나라당 단독의 새해 예산안 처리를 막으려고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차지하고 있던 야당의원이 한나라당 의원들에 의해 단상에서 끌려내려오고 있다. 탁기형 기자
직권상정? 여·야 합의 없으면 꿈도 꾸지 마!
이를 방지하자는 취지로 2012년 5월, 여야 합의로 국회법을 개정했습니다. 이때 개정된 국회법을 ‘국회선진화’법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우리나라 의회를 날치기·몸싸움 없는 국회로 발전시키겠다는 의미로 그런 이름을 붙였는데요. 국회선진화법의 가장 핵심적인 조항은 법률안의 직권상정 요건을 엄격하게 했다는 겁니다. 직권상정이란 소관 상임위와 법사위 심사 등의 중간 과정을 건너뛰고 국회의장이 법률안을 본회의 표결에 바로 부치는 행위입니다. 소수당이 상임위와 법사위 심사 과정에서 목소리 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강력한 권한인데요. 예전 국회법의 직권상정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85조(심사기간) ①의장은 위원회에 회부하는 안건 또는 회부된 안건에 대하여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의장은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협의하여야 한다.
②제1항의 경우 위원회가 이유없이 그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에는 의장은 중간보고를 들은 후 다른 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심사기간 지정’이 바로 직권상정의 전 단계입니다. 국회의장이 소관 상임위가 특정 법안을 심사할 수 있는 데드라인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죠. 국회의장이 정한 마감 시각까지 상임위 심사가 마무리되지 않으면 의장이 법안을 본회의로 바로 가져올 수 있다(직권상정)는 것입니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할 수 있다는 권한만 명시돼있을 뿐 어떤 경우에만 할 수 있다는 ‘제한 조건’은 없었습니다. 다수당과 쿵짝이 맞으면 국회의장은 언제든지 ‘중요 법안’을 본회의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본회의에서 과반수 의원이 찬성만 하면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니, 굳이 소수당과 논의하고 타협할 이유도 없겠죠. 다수당의 독주는 더 속도를 낼 것이고 소수당의 물리적 아우성은 더 커질 것입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며 국회선진화법에서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엄격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제85조(심사기간) ① 의장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위원회에 회부하는 안건 또는 회부된 안건에 대하여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제1호 또는 제2호에 해당하는 때에는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협의하여 해당 호와 관련된 안건에 대하여만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개정 2012.5.25> 1. 천재지변의 경우 2.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의 경우 3.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합의하는 경우
②제1항의 경우 위원회가 이유없이 그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아니한 때에는 의장은 중간보고를 들은 후 다른 위원회에 회부하거나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심사기간 지정, 곧 직권상정할 수 있는 요건이 새로 들어갔습니다. 천재지변이나 국가비상사태, 그리고 원내 교섭단체 간 합의. 정리하면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상임위에 있는 법안을 본회의로 바로 가져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연말에 자신의 관심법을 직권상정해서 처리하라고 국회의장을 압박했지만 정의화 의장이 “직권상정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던 게 바로 이 조항 때문입니다.
직권상정을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19대 국회의 직권상정 사례는 2건으로 확 줄었습니다. 그것도 여야가 법안 처리의 절차상 편의를 위해 합의한 건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기간과 겹치는 18대 국회 때 직권상정은 무려 99건이었습니다. 종합편성채널을 태어나게 한 미디어 악법 등이 직권상정을 거쳐 날치기로 통과된 법들이었죠.
자, 그러면 현행 국회선진화법 조항으로는 여야 합의 없이 쟁점법안을 전혀 처리할 수 없는 거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국회선진화법에는 사실상 국회의장의 직권상정과 비슷한 효력을 낼 수 있는, 이른바 ‘패스트 트랙(신속 처리)’ 조항이 있습니다.
제85조의2(안건의 신속처리) ① 위원회에 회부된 안건(체계·자구심사를 위하여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안건을 포함한다)을 제2항에 따른 신속처리대상안건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경우 의원은 재적의원 과반수가 서명한 신속처리대상안건 지정요구 동의(이하 이 조에서 “신속처리안건지정동의”라 한다)를 의장에게, 안건의 소관 위원회 소속 위원은 소관 위원회 재적위원 과반수가 서명한 신속처리안건지정동의를 소관 위원회 위원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이 경우 의장 또는 안건의 소관 위원회 위원장은 지체 없이 신속처리안건지정동의를 무기명투표로 표결하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또는 안건의 소관 위원회 재적위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문구가 너무 복잡하죠? 간략하게 정리하면 해당 상임위 의원의 5분의 3 이상, 또는 국회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동의하면 여야 합의 없이도 본회의로 법안을 가져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죠. 이렇게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되면 소관 상임위는 그 법안의 심사를 180일 안에, 법사위는 90일 안에 마쳐야 합니다. 합쳐서 270일 안에 법안 심사가 끝나지 않으면 자동으로 본회의에 올라오고 본회의에서는 60일 안에 찬반 표결을 해야 합니다.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 찬성이 있으면 법률이 통과되는 것이죠.
결국 본회의에서 처리하자는 여야간 합의가 없는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려면 국회의원 60%(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합니다. 전체 의석 300석의 60%는 180석입니다. 그래서 새누리당의 이번 총선 목표가 180석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180석만 있으면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구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죠.
박근혜·새누리 “되는 일이 없다…선진화법, 후진시키자”
국회법이 이렇게 ‘선진화’돼있다 보니 157석의 원내 과반 다수당인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맘대로 통과시킬 수 있는 법이 없습니다. 국회선진화법이 최대 걸림돌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새누리당이 개정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초점은 직권상정 요건의 완화입니다.(관련기사: http://goo.gl/2H1ATQ) “재적의원 과반수가 본회의 부의를 요구하는 경우”를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으로 추가했습니다. 천재지변이나 국가 비상사태나 여야 합의가 아니어도 다수당의 요청만으로도 본회의 표결을 하겠다는 얘기입니다. 과반의석만 가지면 예전처럼 소수당과의 논의 없이도 원하는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겠죠. 현행 국회선진화법에서는 국회의장석이나 상임위원장 의장석을 점거하는 의원을 자동으로 윤리위원회에 회부하도록 했으니 소수당이 다수당의 독주를 막을 방법도 마땅찮게 되는 거죠.
정의화 국회의장이 지난 1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20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후 국회 선진화법 개정안에 따른 중재안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새누리당의 국회선진화법 무력화 움직임에 대응해 정의화 국회의장도 개정안을 냈습니다. 직권상정 요건은 엄격히 유지하되 ‘패스트 트랙’ 조건을 완화하는 내용입니다. 신속처리 안건을 지정할 수 있는 요건을 지금의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의결에서 과반수로 낮췄습니다.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되더라도 본회의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현행 330일(상임위 180일, 법사위 90일, 본회의 60일)에서 75일(상임위 60일, 법사위 15일, 본회의 부의는 즉시)로 줄였습니다. 혹 패스트 트랙 제도가 남용될까 ‘국민 안전이나 국가 재정·경제상의 위기가 명백히 우려되는 경우’에만 신속처리가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입법교착 우려를 해소하려는 일단의 고민은 엿볼 수 있습니다.
노무현의 ‘양보’…이런 게 대통령의 ‘정치’
여기까지가 국회선진화법의 내용과 개정 논란의 배경 설명이었습니다. 국회선진화법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한 다수당의 횡포(날치기)와 이를 저지하려는 소수당의 육탄전을 모두 없애려는 취지로 탄생한 제도입니다. 다수결의 논리로 소수의 목소리를 묵살하자는 게 아니라 다수당과 소수당 모두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보자는 것이지요.
물론 현행 국회선진화법이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은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신속하게 정책을 집행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는 ‘입법교착’, ‘법안 점거’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2017년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현재의 야권이 얻은 의석이 180석이 안 되면 경제민주화 등 산적한 개혁입법은 새누리당과의 지난한 협상 과정에서 용두사미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13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열린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다수든 소수든 양식(양심) 없는 정치 세력이 의회에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면 합의 민주주의 실현도 요원한 것이겠죠.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우리 국회는) 동물국회가 아니면 식물국회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수준밖에 안 된다. 어떻게 보면 선진화법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되는 결과”라며 국회를 맹비난하고 선진화법 개정을 촉구합니다.(관련기사: http://goo.gl/d2IXoZ) 그러나 국회선진화법은 2012년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끌던 새누리당의 총선 공약이었습니다. 이명박 정권 심판론이 들끓고 야권연대가 순조롭게 진행됐던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과반 의석 확보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습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국회선진화법을 총선 공약으로 내놓은 측면도 있는 거죠. 그러나 새누리당은 예상 외의 선전으로 과반 의석(152석)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총선 전 여야가 합의한 사항이고 (새누리당이)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꼭 처리됐으면 좋겠다”고 선진화법 찬성 의견을 나타냈습니다. 그해 연말의 대선 승리를 위해서는 표가 떨어질 수도 있는 ‘공약 파기’를 할 수 없었던 거겠죠. 최근 김무성 대표가 국회선진화법을 망국법이라고 몰아세우면서 “당시 권력자가 (국회선진화법) 찬성으로 돌자 반대하던 의원들이 모두 다 찬성으로 돌아섰다”며 박 대통령을 비판했습니다.(관련기사: http://goo.gl/7sCgQ5)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국회선진화법은 새누리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전략적 입법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관련영상] 무지의 베일: 국회선진화법과 정의 /한겨레다큐
박 대통령은 ‘자신이 일을 못하는 이유’로 국회선진화법 탓을 합니다. 여기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사학법 개정을 놓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장외 투쟁을 벌여 국회 일정이 파행을 거듭하던 2006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이 김한길 열린우리당(여당) 원내대표와 이재오 한나라당(야당) 원내대표를 청와대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김한길 원내대표에게 ‘여당의 양보’를 권했습니다. 순간 김 원내대표의 표정이 굳어졌다죠. (관련 기사: http://goo.gl/1FDOhH)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것. 이런 게 정치 아니겠습니까? 지금 박 대통령은 정치를 하고 있습니까? 대한민국 정당의 ‘수준’이 안 되니 국회선진화법을 폐기해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고 할 게 아니라 대화와 타협, 합의의 노력을 더 해보고 대안을 말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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