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3.20 19:27
수정 : 2016.03.20 21:56
후보들-시민 정책토론뒤 경선 투표…‘숙의 배심원단’이 대안 될까
배심원단 50% 무작위 선출
나머지 50%는 학계 등 전문가
토론 진행자 배정하고 생중계
참여한 시민들 “진일보한 제도”
“시간 짧아 숙의하기엔 한계”
‘공정성’ 강화 등도 과제로
노신사는 감개무량한 듯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들고 입을 뗐다. “내가 선거를 관심 있게 살펴본 것만 20년이오. 예전(경선)과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지.” 지난 19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국민의당 ‘숙의 배심원단 경선’에 참여한 정강윤(79)씨의 소감이다. 국민의당은 18~20일 동안 광주 8개 지역구 가운데 6곳의 국회의원 후보를 숙의 배심원단 경선을 통해 선출했다. 지역 유권자 가운데 일정한 배심원단을 구성해 후보들의 정책토론과 질의응답을 듣게 하고, 숙의(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함) 과정을 거친 뒤 현장투표를 통해 후보를 뽑는 경선 방식을 말한다. 국회의원 후보 선출에 이 제도가 도입된 것은 처음이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전화여론조사 방식에 의존해 국회의원 후보를 공천했다.
참여한 시민들은 대체로 이 방식이 ‘진일보한 제도’라는 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제도가) 좀 낯설긴 했지만 만족스러워요. 오기 전엔 질문과 답이 미리 짜인 형식적 행사가 아닐까 의심도 들었는데 진지한 토론이 이뤄지더라고요.” 이번 총선이 생애 첫 투표라는 시민배심원 안아무개(21·대학생)씨의 평가다.
국민의당은 배심원단을 선거구마다 100명씩으로 구성했다. 50%는 무작위로 뽑은 일반 유권자로꾸려지는데 국민의당 지지자와 무당파층만 참여할 수 있다. 나머지 50%는 전문가로 구성했는데, 학계 20%, 시민단체 15%, 직능단체 15%로 꾸렸다. 광주지역 7개 학술단체, 84개 시민사회단체, 39개 직능단체에서 모집했다. 참석한 배심원은 10명씩 한 조로 테이블에 둘러앉아 숙의 과정을 거치는데 조마다 ‘퍼실리테이터’(토론을 이끄는 전문 진행자)가 한 명씩 배정돼 진행을 이끌었다. ‘후보자 정견발표→선관위 질의응답→배심원단 토의→배심원 질문 질의응답→투표’로 이어지는 과정은 모두 4시간이 넘게 걸린다. 국민의당은 숙의배심원제 경선 후보에 현역 의원이 끼어 있는 지역구의 경우, 숙의제 투표 결과만으로 후보를 결정하기로 했다. 모두 신인인 경우엔 숙의제 경선 70%, 여론조사 경선 30%로 뽑는다. 모든 과정은 국민의당 홈페이지를 통해 인터넷으로 생중계됐다.
현역인 권은희 의원이 포함된 광산을의 숙의 배심원제는 일요일인 20일 오전에 열렸다. 배심원들은 매우 진지한 분위기였다. 때로는 후보들에게 더욱 적극적인 답변을 요구하기도 했다. 조아무개(남·50대)씨는 배심원들이 결정한 질문을 후보들에게 묻는 순서에서 “(후보들이) 좀 더 소신껏, 당당하게 이야기해주셨으면 좋겠다. 테이블에서 답답하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 제도를 반기는 목소리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일 경선에서 배심원으로 참여한 김수관 교수(조선대 치의학)는 “시간이 짧아서 충분한 숙의를 할 수 없는 게 아쉬웠다”고 말했다. 박성만(40·농업)씨는 “지역 현안에 대한 후보들의 생각을 더 자세히 들을 수 있는 자리로 기대하고 왔는데 정권 교체 등의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참여 인원을 충분히 보장하기 어려운 여건도 단점으로 꼽힌다. 일요일 오후의 경우 예상을 넘는 120여명의 시민들이 몰렸지만 오전에는 80명에도 못 미치는 등 배심원단 숫자가 들쭉날쭉했다. 휴일에 4시간 넘게 숙의해야 함에도 현재 선거법상 참여 배심원들에게 수고비를 지급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시민의 자발성에만 의존해야 한다. 19일 오후에는 테이블 당 여성이 1명일 정도로 성비가 불균형했다. 최적의 후보를 뽑는 데 한계로 작용하는 요소들이다.
공정성 논란도 보완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배심원 절반에 이르는 전문가 집단의 경우 지역 사정에 밝은 후보들은 어느정도는 미리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우려가 경선 이전부터 제기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배심원은 “이미 지지 후보를 마음에 품고 온 이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다른 정치적 고려 없이 오로지 정책토론만 듣고 후보를 결정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고 했다. 특정 후보와 각별한 친밀감을 표시하는 배심원의 모습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이날 광산구을에서 현역 국회의원인 권은희 후보에게 밀린 고원 후보는 “이 방식이 최선인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책발표와 현장투표로만 답을 내는 숙의제는 정치 신인에게 유리해 현역 ‘물갈이’를 가져오리라 전망됐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숙의제 경선 설계에 참여한 김춘석 한국리서치 이사는 숙의제의 의미를 시민들의 “경험”에서 찾았다. 그는 “여론조사나 다른 경선 방식에서 유권자는 단순히 지지도 산출의 도구처럼 다뤄졌다. 하지만 숙의제에선 여럿이 모여 어떤 정치인이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지 고민하는 경험을 쌓는다. 그것이 선출보다 더 큰 의미라고 본다”고 말했다.
광주/권오성 이승준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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