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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4.12 11:22 수정 : 2016.04.12 13:49

정치BAR_과거를 기억해야 미래가 보인다

SBS 8뉴스 갈무리.


4·13총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4월11일 저녁 8뉴스 리포트. 앵커가 이렇게 말했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권은 항상 정치 쇄신을 약속하죠? 지난 대선 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여야는 국회의원 월급을 깎고, 불체포특권 같은 혜택도 포기하겠다는 공약을 앞다퉈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지켜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스크린에 2012년 대선 공약을 띄웠다. 새누리당은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 폐지와 상설특검 도입, 민주통합당은 비례대표 100명으로 증원,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신설을 약속했는데, 지켜진 건 없다고 양쪽에 엑스표를 친다. 어이가 없었다.

2012년 대선의 승자는 누구인가?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이다. 문재인 후보가 나섰던 민주통합당(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대선에서 패해서 대권을 획득하지 못했다. 2012년 총선에서 국회 과반의석을 점한 정당도 새누리당이다. 입법권과 행정권을 새누리당이 다 장악했다. 민주통합당은 새누리당의 동의 없이는 공약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없는데, 어떻게 새누리당과 똑같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비교가 가능하냐는 말이다.

특히 ‘비례대표 100석으로의 확대’를 공약 미이행 리스트에 올린 부분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비례대표 100석으로의 증원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2015년 2월에 내놓은 선거 제도 개혁안의 핵심이었다. 그동안 민의의 왜곡을 가져온 승자독식의 비합리적인 선거룰을 손질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비례대표 증원에 따른 의석 감소를 우려하며 무대뽀식으로 1년을 버텼고 개혁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민주가 지난 2월,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까지 중단하며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선거법 개정안이 바로 새누리당의 생때로 누더기가 된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그러면서 8시뉴스는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공약, 이번엔 지켜질까?”라는 물음을 던졌다. 정당에 공약 준수를 요구하고 정책을 보고 투표하자는 캠페인 앞에서 늘 공허함은 반복된다.

총선 때만 다가오면 여기저기서 정책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당의 당리당략에 매몰돼 ‘묻지마 투표’를 할 게 아니라 각 당의 공약을 꼼꼼히 살펴 ‘현명한 투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권자의 ‘현명한 투표’를 안내하는 건 언론의 일이므로 정책·공약 평가는 언론의 당연한 의무로 취급되고 권위 있는 언론사라면 그런 기획물을 내놓아야 한다. 그렇게 공약 검증 시리즈를 마치면 ‘경마식 보도’에서 벗어나 수준 높은 콘텐츠를 생산해냈다고 자위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접할 때마다 ‘아이고~ 의미 없다’는 공허함을 떨쳐버릴 수 없다. 공약이란 정당이 국민을 상대로 하는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공약의 신뢰도는 높지 못하다. 온갖 아름다운 말로 치장해 표를 긁어모아 권력을 쟁취한 뒤에는 단물 빠진 풍선껌처럼 길거리에 내뱉어버리는 게 익숙한 패턴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보자. 그의 당선 요인은 여론을 조작한 국정원의 조력도 있었겠지만,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공약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그의 공약과 다짐에서 부패한 기득권 세력인 한나라당을 환골탈태하리라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집권 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수구 기득권으로 회귀했다. 본능적이었다. ‘공약 파기’가 속출했지만 별 일 없이 잘 산다. 거짓공약으로 권력을 찬탈했다고 아직까지 처절하게 심판받거나 하루아침에 정당이 해산되는 경우도 없었다. 그러므로 공약이란, 선거 뒤 휴짓조각이 될 걸 알면서도 건네받는 부도수표에 다름 아니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2012년 11월16일 여의도 당사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책·공약 검증이 무의미한 또 하나의 이유는, 소수정당에는 공약을 이행할 권력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수정당의 정책이 훌륭하면 뭐하나. 승자독식의 선거 제도가 개혁되지 않고 강고한 영남 패권주의가 무너지지 않는 한 새누리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건 상수다. 언론이 군소정당의 공약에 ‘참 잘 했어요’라며 100점을 준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공약 평가는 불공정하다. 미래의 실행력을 미끼로 지키지도 않을 감언이설을 속삭이는 집권당과, 실행력이 담보되지 않아 더욱 이상적으로만 보이는 소수정당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평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공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선거는 불확실한 미래를 가늠하는 게 아닌, 목격했던 과거를 평가하는 기회가 돼야 한다. 특히 총선에서는 행정부를 장악한 대통령과 의회의 구성원인 정당의 행적을 동시에 평가해야 한다. 대통령이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야당이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는 여당에 표를 주면 된다. 반면에 대통령이 계속 저렇게 폭주하면 나라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야당에 표를 줘서 조금이라도 제동을 걸게 해야 한다. 투표 행위는 결국 그 정당에 대한 전인격적 판단의 결과이며, 앞으로 더 잘 할 거라는 믿음과 격려의 표시다.

그래서 여야가 서로 삿대질하며 내놓은 ‘심판론’은 정책선거라는 구호보다 훨씬 의미 있는 주장이다. 실질적인 승부의 지점은 새누리당의 180석이다. 180석만 있으면 새누리당은 야당과의 합의 없이도 단독으로 모든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새누리당이 180석을 얻으면 우선 박근혜 대통령의 ‘관심법’이 바로 통과될 것이다. 국가정보원에 포털·메신저 등 민간통신 서비스 업체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는 사이버 테러방지법, 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 5법’은 박 대통령이 19대 국회 마지막까지 처리를 채근했던 법이다. 야당의 반대로 변변한 논의조차 못했던 교육감 직선제 폐지와 공직자 인사청문회 제한도 이뤄질 것이다.

새누리당이 꿈꾸는 세상, 더 정확히 말하면 박근혜 대통령이 그리는 세상이 매력적이라면 지금까지 ‘발목만 잡아온 야당’을 심판하기 위해 새누리당을 찍어야 한다. 반대로 박 대통령이 원하는 세상이 끔찍하다면 야당을 찍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해야 미래도 꿈꿀 수 있다.

김태규 기자 dokb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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