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리뷰&프리뷰
친절한 기자들
‘1528명’. 2014년부터 올해 4월4일까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신고한 피해자의 숫자(사망자 239명 포함)입니다. 임성준(13)군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자 중 1명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뛰어놀아야 할 나이지만, 임군은 자신의 허리춤까지 오는 산소호흡기를 늘 달고 살아야 합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돌이 지나자마자 폐에 심각한 손상을 입어 산소호흡기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지난 18일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불거진 지 5년 만에 가습기 살균제 판매업체인 롯데마트가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했다는 사진이 대대적으로 주요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한겨레> 1면에는 산소통을 들고 하교를 하는 임군의 모습이 실렸습니다. 이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업체들이 서로 눈치 보기를 하고, 정부는 피해자 구제에 손을 놓고, 검찰 수사는 늦어지는 동안 피해자들의 고통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5년 전 불거졌습니다. 2011년 5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폐질환으로 임산부 8명 중 4명이 숨지고, 3명은 폐이식을 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그해 8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는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 미상 폐손상의 위험 요인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원료로 쓰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에 독성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것입니다. 이 화학물질은 주로 물티슈, 액정 클리너나 손 세정제 등으로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그해 11월 질병관리본부는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 세퓨 가습기 살균제, 와이즐렉 가습기 살균제(롯데마트 PB상품), 홈플러스 가습기청정제(홈플러스 PB상품), 아토오가닉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 클린업(코스트코 PB상품) 등 6개 제품에 대해 수거명령을 했습니다.
‘5200만원’. 하지만 그동안 기업들에 대한 제재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부과가 전부였습니다. 2012년 공정위는 기업들이 안전성을 허위로 광고했다며 과징금을 부과했습니다. 가족들은 그해 8월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사를 형사고발했습니다. 하지만 검찰 수사도 지지부진했습니다. 검찰은 2013년 3월 사망 원인에 대한 보건당국 폐손상 위원회의 역학조사를 기다린다며 1년간 기소를 중지했습니다. 피해자 및 가족들은 2014년 8월 가습기 살균제 원료물질을 생산한 에스케이케미칼 등 5개 업체를 추가 고소했습니다. 경찰이 옥시레킷벤키저(옥시) 등 8개 업체를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것은 지난해 8월입니다. 검찰 특별수사팀이 꾸려지는 데 다시 5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제조·판매업체들은 증거를 은폐하고 빠져나갈 논리를 만드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03명’.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옥시가 대표적이었습니다. 검찰은 옥시 등 가습기 제조·판매업체가 가습기 살균제 위험성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옥시는 2012년 전후 조직적으로 증거를 인멸했습니다. 직원들끼리 주고받은 이메일을 삭제하는가 하면, 문제가 될 만한 내부 보고서 등을 미리 폐기하기도 했습니다. 옥시가 제품이 인체에 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정황도 나왔습니다.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제조 당시 옥시의 선임연구원이었던 최아무개씨는 최근 검찰에서 “제품이 인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상급자에게 보고했으나 흡입독성실험 등 안전성 검사는 하지 않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옥시가 원가 절감을 위해 안전성 점검을 소홀히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국내 가습기 살균제 시장은 10억~20억원에 불과했는데 흡입독성실험 비용은 3억여원에 이르렀습니다.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동안 꿈쩍도 안 하던 기업들은 잇따라 사과를 하고, 보상 대책을 내놨습니다.
서영지 사회에디터석 법조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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