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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17 19:39 수정 : 2016.05.18 11:32

제36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은 백운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어린이들이 1980년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고 윤상원의 묘에 헌화하고 있다. 광주/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누가 5·18을 흔드나

‘시민군 대변인과 마지막 인터뷰’ 마틴 기자의 증언

“그는 도망가지 않았고, 저항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도 죽었다.”

브래들리 마틴 전 미국 '볼티모어 선' 기자. 사진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16일 밤 광주광역시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난 브래들리 마틴 전 미국 <볼티모어 선> 기자는 80년 5월26일 밤 계엄군의 광주 진압 전날 밤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1950~1980)과 마지막 인터뷰를 했던 장면을 회고했다. “그는 내 눈을 봤고, 그는 나를 선택해 인터뷰를 했다. 나한테 남기는 마지막 유언 같았다.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윤상원의 모습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끝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2000년 쓴 ‘상징적 자살’ 표현을
이리 비틀다니…돌아가 다시 쓸 것”

사망 직후 첫 사진 소프 기자도
“가지런한 모습…자살 아니다”

“나는 이미 그(윤상원)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1994년 월간 <샘이 깊은 물>에 기고한 마틴의 글)

윤상원은 인터뷰 때 했던 말처럼 5·18 항쟁 당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80년 5월27일 새벽 산화했다. 윤상원은 최근 제창 논란이 일고 있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진 계기가 된 인물이다. 이 노래는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1957~1978·전남대 역사교육과)의 영혼결혼식 두 달 뒤인 1982년 4월 만들어졌다.

일부에서는 마틴이 2000년에 쓴 기고문 가운데 ‘상징적 자살’(symbolic suicide)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들어 ‘윤상원이 수류탄으로 자살했다’는 주장을 편다. 이에 대해 그는 “불시트(bullshit·허튼소리)!”라며 “완전히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틴은 이날 그가 2000년에 쓴 글의 ‘상징적 자살’이라는 의미와 관련해 “윤상원이 당시 계엄군이 (다음날) 온다는 것을 알고서도 죽음을 각오할 작정이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 윤상원의 죽음을 왜곡한 글과 관련해 “미국에 돌아가 그 부분에 대해 글을 쓰겠다”고 말했다.

극우세력들은 윤상원이 “80년 5월 최후의 저항을 진두지휘했던 5·18의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5·18을 왜곡하면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몰고 있다. 이는 “5·18 항쟁의 정당성과 희생 등 광주정신을 비틀기 위한 것”이다. 일부 극우세력들은 ‘윤상원의 주검 옆에 불에 타 녹아내린 커튼이 재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기사 내용 등을 자살의 근거로 들고 있다. 80년 5월27일 새벽 시민군 저항 기지였던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사살된 시민군 15명 중 2명만 계엄군 희생자라는 황당한 주장도 펴고 있다.

노먼 소프 전 기자(미국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도 지난 16일 5·18 시민군 출신 인사들과 만나 윤상원 자살 주장과 관련해 “완벽한 왜곡”이라고 말했다. 그는 윤상원이 옛 전남도청 민원실 2층에서 사망한 직후 최초로 사진을 찍은 외신기자다. 소프는 ‘윤상원의 사인이 자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라는 질문에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자살했다면 그가 무엇으로 불을 질렀단 말인가? 또 불이 타는 동안 고통스러워 주위가 어질러져 있을 텐데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면 가지런히 ‘일자’ 모습이고 불타버린 잿더미도 그대로다. 분명히 어떤 다른 이유로 먼저 죽고 난 뒤에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윤상원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은 ‘화상과 자상’으로 검시 기록에 남아 있다. 5·18 한 연구자는 “총에 맞고 이불에 덮인 채 있던 윤상원이 움직이지 않자 계엄군이 인화성 물질을 투척해 이불에 불이 붙었고, 불탄 뒤 사망을 확인하기 위해 대검으로 찔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광주/글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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