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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2 21:20 수정 : 2016.05.23 14:11

구조조정, 구멍뚫린 안전망 ①

54.6%는 고용보험 가입안돼
특별고용지원업종 지정해도
실업급여 아무런 혜택 못받아

이민선(가명·53)씨는 2010년 자신이 사무직으로 평생 몸담았던 회사가 부도가 났다. 법정관리 절차에 들어간 회사는 퇴직을 권고했다. 50살 가까운 사람을 사무직으로 써줄 회사는 없었다. 2013년 우연히 조선업 생산직 노동자를 구한다는 지하철 광고를 봤다. 이씨는 건강진단을 받고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로 내려갔다. 생산직으로만 알고 일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물량팀’(하청업체에서 다시 재하청을 받는 계약직 노동자)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했는지도 가물가물하지만 고용보험에 들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당시 물량팀장은 “세금 다 내다가는 남는 게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정 원하면 회사 보험료까지 저보고 내라고 하더라고요.” 이는 이씨가 실직을 해도 실업급여(구직급여)를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조선업 구조조정이 급물살을 타면서 현대중공업이 생산직 노동자들에 대해 사상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하는 등 인력 감축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특히 하청업체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1순위’로 꼽힌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고용보험에 가입조차 돼 있지 않아, 실업급여조차 탈 수가 없다. 중국의 추격, 빠른 기술 변화, 저성장 등으로 일자리 구조조정에 대한 불안은 점점 커져가고 있지만, 고용안전망은 여전히 허술하고 사각지대가 많아 노동자에 대한 기본적 보호 역할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재하청 노동자, 가장 먼저 잘리지만 안전망은 전무 “원청과는 구두로 도급계약을 맺는다. 업무 내용, 기간 설정은 따로 없고 블록 단가만 책정해서 일을 시작한다. 재계약은 없다. 단가가 안 맞거나 공정을 못 맞출 때는 떠나야 한다. 항상 불안하다.”(물량팀 노동자·44) “구조조정이 어마어마하게 일어난다. 급해서 썼던 사람들이라 자기 맘에 안 들면 잘라낸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그만두는 거다. 고용안정이 어디 있느냐? 낭떠러지 위에서 밧줄 위에 서 있는 거다.”(물량팀 노동자·42)

조선업 물량팀 노동자들이 전하는 고용 불안이다. ‘밧줄 위에 서 있지만’ 떨어질 경우 받쳐줄 그물은 없다. 이민선씨는 “물량팀에 있고 싶지 않다”고 했다. 4대 사회보험도 내고, 실업급여도 퇴직금도 받을 수 있는 1차 하청업체의 정규직 노동자로 정년 때까지 일하고 싶다고 했다.

2015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를 보면, 정규직의 고용보험 가입률은 95.4%에 이르지만 비정규직은 66.7%에 그친다. 특히 단기간 노동자(65%)와 일일 노동자(46%)는 더욱 낮은 편이다. 조선업종의 특수한 비정규직 형태인 ‘물량팀’의 하청노동자가 여기 속한다.

“항상 불안…낭떠러지에서 밧줄 잡고 서 있어”

근로계약서 없고 구두계약
“물량팀에 있고 싶지 않다”
고용보험 가입해도 6개월 후 혜택

조선업 노동인력은 원청 정규직으로부터 시작해 1차 하청업체 상용직-기간제-단기계약직을 거쳐 2·3차 하청업체인 물량팀으로 이어진다. 물량팀은 10~20명씩 팀을 짜는데 계약 기간은 보통 3개월이다. 재계약이 없으면 그냥 퇴출이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에서만 지난 16개월간 하청노동자 849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더 큰 문제는 물량팀 하청노동자 절반 가까이가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물량팀 하청노동자 489명을 설문조사해 펴낸 ‘2015년 조선업종 물량팀 노동조건실태 연구’를 보면 4대 사회보험(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다고 응답한 노동자는 61.9%에 그쳤다. 2014년 민주노총 경남지부가 발표한 ‘거제통영고성 중소 조선소 비정규직 노동자 실태조사’에서도 고용보험에 가입한 물량팀 노동자는 54.6%로 나타나 있다.

정부는 현재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해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이 대책 또한 하청노동자들은 비켜갈 가능성이 크다.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되면 정부는 고용유지지원금, 특별연장급여, 전직·재취업 등을 확대 지원한다. 90~240일 지급되는 실업급여는 120~270일로 늘어나고, 지급 수준도 실직 전 평균 임금의 50%에서 60%로 올린다. 지원 기간은 1년 이내로 결정되지만 그 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기간 연장을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고용보험 가입 노동자’라는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조선업이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되더라도 물량팀 노동자 2명 중 1명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자리를 잃을 위험이 가장 높고, 생계 지원이 가장 절실한 계층이 오히려 정부의 특별지원에서 빠지는 것이다.

■ 넓은 고용보험 사각지대 1995년 고용보험이 처음 도입되면서 실업급여 제도 등 고용안전망의 제도적 틀은 갖춘 상태다. 하지만 문제는 법적·실질적 사각지대가 너무 넓어, 실제 실직 뒤 고용보험 혜택을 못 받는 노동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가장 큰 법적 사각지대는 자영업자다. 2015년 3월 현재 취업자 2550만명 가운데 자영업자는 670만명. 이들은 고용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고용보험은 기본적으로 임금노동자(1880만명)를 적용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자 중에서도 고용보험 가입 비율은 64%(1204만명)에 그친다. △공무원 등 비적용 직종(140만명)과 △특수형태 근로자(55만명) △65살 이상(93만명) △1개월 근로시간이 60시간(주간 15시간) 미만인 노동자(117만명)는 법적으로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나머지 280만명은 사업주나 노동자가 보험료가 부담스러워 고용보험 가입을 하지 않은 경우다. 결국 고용보험 가입자는 전체 취업자의 47.2% 정도다. 특히 고용보험 가입률은 임시·일용직일수록, 소득이 낮을수록 낮은데, 이들은 고용 상태마저 불안정하다. 상용직의 실직 경험률은 4.3%로 낮지만, 임시직은 16%, 일용직은 31.7%로 높은 편이다.

■ 자발적 이직자는 못 받아 고용보험에 가입했더라도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지난 18개월 적용 대상 기간 중 180일 이상 피보험자로 고용보험료를 납부한 실적이 있어야 한다. 대우조선해양 노조가 최근 하청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을 독려하고 있지만, 이들이 특별고용지원업종 지정의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이유다.

피보험기간을 충족하더라도 회사를 ‘자발적’으로 떠났다면 또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삼성중공업 사내하청업체인 성우기업에서 일하다가 지난 11일 목숨을 끊은 정현우(가명·38)씨도 실업급여 대상이 될 수 없다. 회사의 인사명령에 불만을 나타내며 스스로 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정씨는 지난 9일 회사 조직 개편으로 물량팀으로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다. 병역특례로 조선소 하청업체에 입사해 25살에 반장이 됐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정씨는 모욕감을 느꼈다. 정씨는 사표를 내고 20년간 일해온 일터를 떠났고, 다음날 숨진 채 발견됐다.

까다로운 수급자격 요건 탓에 고용보험 가입자였다가 실업자가 돼도 실업급여를 받는 비율은 20%에 그친다.

■ 노동시장 외부자 보호해야 거제통영고성 조선소 하청노동자 살리기 대책위원회 이김춘택 정책홍보팀장은 “기존의 고용보험제도를 고집해서는 조선업 대량 해고 사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은 남재욱 연세대 박사과정과 함께 발표한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와 정책과제에 관한 연구’에서 “제도 외부에 존재하는 구직자를 보호할 실업부조 제도 도입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병희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저소득 노동자에 대해 사회보험료를 지원하는 두루누리사업이 있지만 방대한 사각지대 규모에 비해 그 해소 효과는 제한적”이라며 “신규 가입자를 우대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재설계하고 지원금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정은주 박태우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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