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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20 18:20 수정 : 2016.12.20 19:03

이춘재
법조팀장

10여년 전 삼성 ‘엑스(X)파일’(국정원 도청 녹취록)로 세상에 알려진 ‘떡값 검사’는 당시로선 묘수였다. 검사와 학연, 지연 등으로 얽힌 그룹 임원들을 동원해 구체적인 청탁 없이 친분을 앞세워 ‘떡값’을 건넴으로써 대가성이 입증돼야 하는 뇌물죄를 피해갈 수 있었다. 떡값에 길들여진 이들은 삼성 쪽의 부탁이 없어도 알아서 봐줬다. 명백한 혐의에도 수사에 손 놓고 있거나 혐의 중 일부만 기소해 형량을 대폭 낮춰줬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이들을 단죄할 기회를 맞았지만 검찰과 이어진 조준웅 특별검사의 수사에서도 형사처벌은 이뤄지지 않았다. 특검은 ‘김 변호사의 증언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댔으나 잘나가는 검사들치고 떡값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드문 현실을 고려했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였을 것이다. 당시 ‘삼성 떡값을 제대로 수사하면 검찰청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 차마 동료에게 칼을 겨눌 수 없는 검사의 ‘양심’이 재벌과 검사의 부적절한 스폰서 관계를 단절할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다.

그로부터 7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난 13일에는 법관의 ‘양심’이 현직 검사장과 기업인의 스폰서 관계를 처벌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1심 재판부가 진경준 전 검사장이 친구인 김정주 넥슨 창업주한테서 받은 9억원을 뇌물이 아니라고 판결한 것이다. 판결문을 본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그야말로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결”이라고 촌평했다. 판사도 얼마든지 스폰서를 가질 수 있는 지위에 있음을 고백한 판결로 읽혔다는 것이다. 실제 판사도 검사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서 스폰서를 가질 확률이 매우 높은 집단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올 한해 법조계를 시끄럽게 한 ‘정운호 게이트’를 보라. 부적절한 스폰서 관계의 당사자로 여러 판사들이 거론됐고 그중 한 명은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판결문에는 진씨와 김씨를 아예 봐주려고 작정한 게 아닌가 의심이 드는 대목도 있다. 김씨가 ‘친구(진경준)가 검사였기 때문에 (주식 등을) 주게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진술했는데도 ‘진술이 추상적’이라며 직무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씨가 ‘불법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사업을 운영한다고 보이지 않는다’거나,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어 (진씨한테 공짜로 준 주식 등의) 대가성이 없어 보인다’는 대목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김씨는 현재 개인회사를 만들어 계열사를 헐값에 사들이고 조세회피처의 역외펀드를 통해 탈세한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무엇보다 넥슨은 ‘돈슨’이라 불릴 정도로 업계에서 무분별한 이익 추구로 비난을 받고 있다. 이런 기업을 ‘불법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한다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판결은 법관의 양심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그 양심이 국민의 법감정과 지나치게 괴리돼 있다면 국민들의 눈엔 양심이 아닌 ‘독선’으로 비칠 수 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10여년 전 공개적인 자리에서 한 항소심 재판부가 재벌 총수를 집행유예로 풀어준 것을 거론하며,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판결해야 한다”고 법관들한테 주문한 적이 있다. 당시 판사들은 ‘대법원장이 특정 사건을 거론한 것은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여론은 이 전 대법원장의 발언에 환호했다. 국민들의 답답함을 속시원하게 대변해줬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줄이는 것이 사법부의 과제가 아닐까.

c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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