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100일] 경제 부문
문재인 정부는 비교적 경제 환경이 좋을 때 첫 임기를 시작했다. 세계 경제 회복에 올라탄 국내 수출이 급격히 증가하고 오랜 기간 부진했던 소비심리와 설비투자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고 있다. 김대중 정부부터 박근혜 정부까지 전임 정부가 모두 불운한 임기 첫해를 맞이한 것과 대조적이다.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노무현·이명박 정부는 각각 카드대란과 세계 금융위기와 함께 출발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경기 급락을 막기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으로 임기 첫 해를 보냈다. 물론 10여년만의 미국의 금리 인상이나 북핵 위기 등 잠재적 위험은 도사리고 있으나 경제에 충격을 줄 정도로 가시화되거나 통제 불가능한 위기로 확산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수출·대기업 위주 성장’ 공식 깨고‘소득주도 성장’ 전략 본격 시동
최저임금 인상·공공 일자리 확충
확장적 예산편성으로 재분배 강화 방향 긍정평가 많고, 기대 높지만
재정부담 구제 대안 명확하지 않아
현실 적합성 놓고 우려 목소리
‘집권 뒤 복지확대 소극적’ 지적도 비교적 양호한 대내외 경제 여건은 5월10일 임기를 시작한 이후 100일 동안 문재인 정부가 쉼없이 내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조기 대선’에도 불구하고 ‘위기 관리’에 발목 잡히지 않고 애초 대선 때 제시한 공약을 차근차근 구체화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새 정부의 인수위원회 구실을 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국정 5개년계획 보고서’를, 정부는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을 통해 새 정부의 경제정책의 큰 밑그림을 국민에게 알렸다. 이어 8~9월에 발표될 ‘2018년 예산안’과 ‘2017~2021 국가재정운용계획’에는 좀더 구체적인 정책들이 담길 예정이다. 패러다임 전환 시동 문재인 정부는 경제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란 말을 자주 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과거의 성장 공식은 심각한 불평등과 저성장을 낳으며 벽에 부딪혔다. 정책 전환이 시급한 이유”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는 반세기 남짓 동안 수출·대기업 중심 성장 전략을 취했다. 정부는 수출 대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세금을 깎고, 규제는 풀었으며, 은행을 동원해 싼 이자로 이들에게 돈을 빌려 줬다. 수출 대기업이 잘 돼야 모두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낙수효과’를 기대해서였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대기업의 부정부패나 편법 승계, 불합리한 지배구조, 중소기업·노동자에 대한 ‘갑질’은 애써 모른척했다. 새 정부는 정책 중심에 ‘가계 소득’을 두고 있다. 소비의 원천인 소득 기반을 두텁게 해 경제의 선순환을 유도하려는 전략이다. 최저임금의 큰 폭 인상과 대·중소기업 공정 경쟁 문화 구축, 아동수당 도입과 기초연금 인상과 같은 복지 확대를 약속하거나 실행에 옮겼다. 과거 정부가 기업 환경을 개선해 일자리 확충을 ‘유도’한 것과 달리 새 정부가 ‘직접’ 세금을 투입해 공공 일자리를 늘리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부에선 ‘비주류 경제학’에 기반했다거나 ‘검증되지 않은 실험’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하지만 사실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은 국외에선 그리 낯설지 않다. 가계 소득 확충을 중심에 둔 성장론은 이미 2010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제기됐다. 재분배 강화를 통한 불평등 축소가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져온다는 ‘포용적 성장론’은 2013년 전후로 국제 사회에 자리잡았다. 모두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대한 반성 과정에서 나왔다. “한국의 패러다임 전환은 국제사회 논의에 견줘 다소 때늦은 감이 있다”(이찬우 기획재정부 차관보·새정부 경제정책방향 기자간담회 중)는 고위 경제관료의 고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복영 경희대 교수(경제학)는 “높은 수준의 불평등과 저소득 가구의 상대적으로 높은 소비성향을 염두에 둘 때 재분배 정책 강화를 통한 저소득가구의 소득 확충은 소비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현 시점에서 추진해볼 수 있는 성장 전략”이라고 말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 100일 하지만 경제정책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책 설계가 정교하게 되지 않으면서 현실 적합성이 떨어져 보이거나 부작용이 우려되는 정책도 여럿 보인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성태 엘지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방향성이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구체화된 정책을 보면 현장 의견을 얼마나 수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때가 적잖다”고 짚었다. 한 예로, 새 정부는 2018년 적용 최저임금을 시급 기준으로 전년보다 16.4% 끌어올렸다. 최근 5년(2013~2017년) 연평균 인상률(7.1%)의 두 배가 넘는다. 당장 영세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늘어날 인건비 부담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법정 최저임금을 지키지 못할 사업자도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 가파른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는 3조원 남짓 재정을 투입해 인건비 부담을 지원한다고 밝혔지만, 정작 실행 방안을 짜고 있는 경제관료들조차 명확한 밑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충분한 준비 없이 서둘러 정책을 추진한 탓이다. 공공 일자리 확충이나 건강보험의 보장성 확대 등 재정이 많이 들어가는 정책을 내놓고 있으나 비용 추계를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끊이지 않는다. 국정기획위는 공무원 17만4천명을 충원하는 데 5년간 21조원이 필요하다고 봤으나 국회예산정책처는 이보다 두 배 더 많을 것으로 내다봤다.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를 위해 정부는 보험료 인상을 3%대에 묶고 재정(기금 포함)에서 임기 5년간 30조원을 쓴다고 밝혔으나, 다음 정부가 져야 할 재정부담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연구위원은 “정책의 정교화를 위해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밟아야 한다. 2017년 세법개정안을 만들 때마저도 조세재정연구원은 논의에서 소외됐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새 정부의 경제 부문 인재풀이 좁은 것 아니냐는 의문도 나온다. 집권 뒤 속도조절 나선 복지확대 소득주도 성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복지 확충은 중요한 과제이지만 집권 뒤엔 오히려 속도 조절에 나서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온다. 한 예로, 아동수당은 대선 공약에선 5살 이하 아동에게 월 10만원으로 시작해 ‘단계적 인상‘을 한다고 했지만, 국정기획자문위의 100대 국정과제 발표 보고서에선 ‘단계적 인상’이라는 언급이 아예 빠졌다. 대선 초기에만 해도 ‘완전 폐지’해야 한다고 했던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은 매우 제한된 범위에서 단계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윤홍식 인하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새 정부의 복지예산 증가 속도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단 빠르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견주면 느릴 것으로 예상한다. 새 정부가 복지국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정부는 2016년 현재 10.4%인 국내총생산 대비 복지지출 비율이 임기 말엔 12~13%에 이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고령화에 따른 연금 지출과 같은 자연증가분을 빼면 복지제도 확충 효과는 임기 내 1~2%포인트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2016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은 21.0%에 이른다. 적극적 복지 확대가 보이지 않는 이유를 소극적인 세수 확충 의지에서 찾는 시각이 많다. 새 정부는 박근혜 정부가 넘겨준 초과세수 60조원을 쌈짓돈 삼아 복지 확대를 추진하고 있을 뿐이다. 문 대통령이 대선 때는 재정 지출 증가율을 임기 내 연평균 7%로 제시했다가 집권 이후에는 이 비율을 5%내외로 슬그머니 낮춘 것도 지출을 공격적으로 늘리기엔 세수가 부족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애초 대선 초기 때 밝힌 것처럼 정부가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전히 폐지하려면 연간 10조원가량의 재정이 필요하다. 윤 교수는 “복지국가를 전향적으로 검토한다면 세수 확충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부자증세 6조원 말곤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고 밝혔다. 정성태 책임연구원은 “복지 확대를 위한 재원을 어느 계층에 어떻게 부담시킬지에 대해 정부의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경제 주체들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패러다임 전환은 매우 점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김경락 박기용 기자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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