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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26 18:13 수정 : 2018.02.26 19:09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왜 싸이가 출연하지 않았을까.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스윽 등장해서 “즐길 줄 아는 당신이 진정 챔피언!” 했더라면 평창의 밤은 더욱 뜨거웠을 것이다. 이디엠(EDM)은 신선하였으나, 거대한 경기장을 열정의 클럽으로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박자는 있었으나 리듬이 없었다. 빠른 박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폐막식 전체의 흐름, 그 감정의 리듬 위로 음악이 쇼트트랙 선수들처럼 스케이팅했어야 하는데, 아쉬웠다.

하여간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송승환 총감독은 “싸이와 만났으나 본인이 아시아경기대회 때 워낙 많은 비난을 받았다면서 고사했다”고 말했다. 싸이 말이 맞는다.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 때 싸이는 ‘대표선수’로 비난을 받았다. 그 대회의 개막식은 조잡한 ‘한류 국뽕’에 이른바 ‘인기가수 교체출연’ 정도였다. 의미도 없었고 맥락도 없었다.

이번에도 한류가 있었고 스타 가수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이 있었다. 왜 그 순간인가 하는 연출 의도가 확연했다. ‘한류 상품’이 아니라 이른바 ‘우리 것’에서 당대의 일그러진 삶을 담아낸 뮤지션들이 등장했다. 장사익과 ‘잠비나이’ 그리고 ‘두번째 달’이 그들이다. 정중동의 숨막히는 순간도 있었다. 개막식의 ‘정선 아리랑’ 말이다.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이번 올림픽의 개·폐막식은 30년 전 ‘한강의 기적’을 ‘디지털의 기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평화’가 주제였으나 심미적으로 드러나지 못했다. 물론 시공간적 제약이 많은 개·폐막식에서 구체적인 소재를 섬세한 내러티브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개막식 연출자 양정웅씨의 말처럼 분명한 소재와 이미지들이 ‘직관적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기는 해도 ‘평화 비둘기’는 아쉬웠다. 비둘기가 전하는 간절한 메시지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5G에 놀란 것이다. 평창 하늘의 퍼포먼스도 놀라웠으나 그 또한 드론이라는 ‘와우 포인트’에 대한 탄성이었다. 장내에 펼쳐진 이미지들도 의미 있는 메시지의 강렬한 교감이라기보다는 첨단 매핑아트에 따른 감각적 반응이었다.

이는 연출이나 시공간적 문제보다는 아직 우리 사회가 ‘실질적인 평화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런던을 ‘지옥’이라고 부르고 그 참담한 상황에서 어떻게 노동운동, 여성운동, 정치운동이 펼쳐졌는가를 보여준 2012 런던올림픽을 떠올려 보면, 언제든 일상이 교란될 수도 있는 분단 상황에서, 아직은 ‘비둘기’로 평화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정파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마는 이 사회에서 최소한 ‘합의’할 수 있는 정도에서, 개·폐막식의 메시지가 다소 펑퍼짐하게 펼쳐졌다.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본다. 언젠가 이 한반도가 살아낸 ‘당대의 삶’을 그 무렵의 최첨단 기술로 펼쳐내는 개·폐막식 말이다. 굳이 고대의 어느 무덤에서 소재를 찾을 게 아니라 우리가 극복해온 근현대사에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역동적인 역사적 소재들이 펼쳐져 있다. 인간적 삶을 위한 아름다운 여정! 식민과 가난, 독재와 차별, 전쟁과 분단의 공포를 이겨낸 위엄 있는 한반도의 삶 말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2032 여름올림픽은 어떤가. 이를테면 서울과 평양이 함께 치르는 진정한 평화 올림픽! 그때가 되면 평창의 비둘기가 휴전선 위로 훨훨 날아다니고 남과 북의 전쟁 무기가 평화를 위한 소재로 아름답게 뒤바뀌는, 실질적인 평화의 역사적 스펙터클이 펼쳐질 것이다. 북으로 떠나며 흘린 북한 선수들의 눈물은 가짜가 아니었다. 평창은 이런 상상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성공한 올림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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