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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07 10:48 수정 : 2018.04.07 19:15

만 44살. 남들 은퇴할 나이에 노르딕스키에 도전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46살에 출전한 2018 평창겨울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서 9일 동안 7개 종목 모두 완주했다. 총 주행 거리는 마라톤 풀코스(42.195㎞)보다도 긴 53.63㎞. 온몸을 오직 두 팔에만 의지해 설원을 질주한 시간은 총 3시간40분58초42다. 이도연 선수는 ‘포기’라는 두 글자를 잊었다. 대신 평창의 설원에 ‘완주’라는 두 글자를 7번이나 새겼다. 20살 때 입은 하반신 마비를 딛고 혼자 세 딸을 억척스럽게 키우며 도전을 이어가는 그는 평창에서 ‘철의 여인’으로 거듭났다. 이제 그의 꿈은 2년 뒤 도쿄패럴림픽을 향하고 있다. 2016년 여름 리우패럴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핸드사이클 종목이 무대다. 설원이 아닌 도로를 두 팔의 힘으로 내달리는 그의 삶을 따라가봤다. 사진은 이도연 선수가 지난 1일 전북 익산 마동의 집 근처 공원에서 핸드사이클 도로훈련을 하는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패럴림픽 노르딕스키 이도연 선수

만 44살. 남들 은퇴할 나이에 노르딕스키에 도전했다. 태극마크를 달고 46살에 출전한 2018 평창겨울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서 9일 동안 7개 종목 모두 완주했다. 총 주행 거리는 마라톤 풀코스(42.195㎞)보다도 긴 53.63㎞. 온몸을 오직 두 팔에만 의지해 설원을 질주한 시간은 총 3시간40분58초42다. 이도연 선수는 ‘포기’라는 두 글자를 잊었다. 대신 평창의 설원에 ‘완주’라는 두 글자를 7번이나 새겼다. 20살 때 입은 하반신 마비를 딛고 혼자 세 딸을 억척스럽게 키우며 도전을 이어가는 그는 평창에서 ‘철의 여인’으로 거듭났다. 이제 그의 꿈은 2년 뒤 도쿄패럴림픽을 향하고 있다. 2016년 여름 리우패럴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핸드사이클 종목이 무대다. 설원이 아닌 도로를 두 팔의 힘으로 내달리는 그의 삶을 따라가봤다. 사진은 이도연 선수가 지난 1일 전북 익산 마동의 집 근처 공원에서 핸드사이클 도로훈련을 하는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장애인 노르딕스키 국가대표 이도연(46) 선수는 유선(25), 유준(23), 유휘(21) 세 딸의 엄마다. 34살 때 탁구로 처음 운동을 시작해 40살 때 장애인 전국체전 육상 투척 종목 3관왕에 올랐고, 44살 때 리우패럴림픽에서 ‘핸드사이클’ 은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지난달 평창겨울패럴림픽에선 장애인·비장애인을 통틀어 국내 최초로 여름·겨울올림픽 출전 기록을 세웠다. 2020년 도쿄패럴림픽으로 이어질 ‘아름다운 질주’를 미리 그려본다.

이도연 선수는 세 딸을 일러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자 생명줄이라고 표현했다. 요즘은 주말조차 네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 힘들 정도다. 이도연 선수와 가족들이 전북 익산 마동 집 근처 공원에서 시소에 앉아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아버지(이민형), 막내딸(유휘), 이도연 선수, 첫째딸(유선). 둘째딸(유준)은 함께하지 못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예상대로였다.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씩씩하고 적극적이었다. “메달도 못 땄는데 무슨 인터뷰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메달보다 더 큰 감동을 주지 않았느냐”는 말에 겸연쩍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정식 인터뷰가 성사됐다.

지난달 18일 막을 내린 2018 평창겨울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은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저마다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장애인 선수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폐막 하루 전날(17일), 신의현 선수의 역대 겨울패럴림픽 사상 한국인 첫 금메달 소식은 국민들에겐 깜짝 선물이었고, 같은 날 오후 장애인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따낸 투혼의 동메달은 평창 드라마의 정점이었다. ‘영미’의 기운을 이어받은 휠체어컬링 선수들은 예선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하며 ‘오벤저스’(오성+어벤저스) 돌풍을 일으켰다. 비록 부담감을 떨치지 못한 채 준결승과 3-4위전에서 잇따라 져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으나, 장애를 떨치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다섯 남매의 자랑스러운 모습은 큰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선수가 있다. 장애인 노르딕스키(크로스컨트리스키·바이애슬론) 이도연(46)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슈퍼맘’ ‘철의 여인’ ‘위대한 엄마’ ‘슈퍼우먼’ 등 그의 이름 앞에 따라붙는 수식어도 여럿이다. 그는 유선(25)·유준(23)·유휘(21) 세 딸의 엄마다. 34살 때 처음 운동을 시작해 40살 때 출전한 2012년 장애인 전국체전에서 3관왕에 올랐고, 2016년 리우여름패럴림픽에서는 자전거 페달을 손으로 돌려 달리는 ‘핸드사이클’ 로드레이스 종목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그는 리우패럴림픽이 끝나자 남들 은퇴할 나이인 만 44살 초겨울에 스키를 배우기 시작해 눈밭에서 씨름한 지 1년 남짓 만에 당당히 평창겨울패럴림픽 무대에 섰다. 그리고 9일 동안 7개 종목에 출전해 완주에 완주를 거듭하는 ‘초인의 힘’을 보여줬다.

3월10일 장애인 바이애슬론 여자 6㎞ 좌식경기 16명 중 12위(26분11초3).
3월11일 장애인 크로스컨트리스키 여자 12㎞ 좌식경기 19명 중 13위(45분49초6).
3월13일 장애인 바이애슬론 여자 10㎞ 좌식경기 13명 중 11위(53분51초1).
3월14일 장애인 크로스컨트리스키 여자 1.1㎞ 좌식경기 25명 중 18위(4분13초92).
3월16일 장애인 바이애슬론 여자 12.5㎞ 좌식경기 15명 중 11위(1시간2분27초3).
3월17일 장애인 크로스컨트리스키 여자 5㎞ 좌식경기 23명 중 15위(19분59초4).
3월18일 장애인 크로스컨트리스키 혼성계주 13팀 중 11위(30분10초2). 이 가운데 3번째 주자로 나서 7.03㎞를 8분52초8에 주파.

3월13일 오전 강원도 평창 바이애슬론센터에서 열린 여자 10㎞ 좌식경기에서 이도연 선수가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평창/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도연 선수가 2018년 3월, 평창의 설원에 새긴 소중한 기록이다. 7차례 경기에 출전해 주행한 거리를 모두 더하면 53.63㎞. 마라톤 풀코스(42.195㎞)보다도 긴 거리다. 스키가 달린 썰매에 앉아 오직 두 팔의 힘으로 온몸을 지탱하며 설원을 질주한 경기 시간을 합하면 무려 3시간40분58초42다. 평창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인 ‘아이언맨’ 윤성빈 선수는 이런 이도연 선수를 보면서 “평창패럴림픽에서 가장 감동받았다”고 했다. 철인이 칭찬한 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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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뺑뺑이 돈 거리도 있잖아요”

지난달 27일과 28일 휠체어를 탄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가슴의 태극마크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는 “패럴림픽은 끝났지만 여전히 바쁘고 분주한 일상”이라며 입을 뗐다. 대뜸 그 나이에 어떻게 53.63㎞를 질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씩 웃으며 즉답 대신 이런 말이 돌아왔다. “(53.63㎞보다) 더 길어요. 사격이 빗나가 뺑뺑이 돈 거리도 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스키와 사격을 결합한 바이애슬론은 사격을 해 표적에 맞히지 못할 경우 한번 빗나갈 때마다 100m의 페널티가 부여된다. 선수들은 이것을 ‘뺑뺑이’라고 부른다.

2018 평창겨울패럴림픽 바이애슬론 여자 10㎞ 좌식경기에서 역주를 펼치는 이도연 선수. 이 경기에서 이 선수는 53분51초1의 기록으로 13명 중 11위를 차지했다. 평창/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한겨레> 3월12일치 1면을 장식한, 이도연 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장면을 담은 3장의 연속사진은 극한의 고통을 잘 보여준다. 3월11일 크로스컨트리스키 여자 장거리 12㎞ 좌식경기에서 온 힘을 다해 결승선을 통과한 뒤 눈물을 쏟는 장면이다. 사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하면 숨을 헐떡이며 눈밭에 그대로 쓰러질 정도로 한 경기 한 경기가 고통스럽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온몸이 쑤시고 아파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이도연 선수는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다시 스타트라인에 섰다. 사실 그는 어깨가 좋지 않다. “오른쪽 어깨 인대는 예전에 끊어진 적이 있고, 왼쪽 어깨 인대도 끊어지기 직전”이다. 장애인스키 선수에겐 치명적인 부상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다. 그는 “의사 선생님도 ‘의학적으로나 상식적으로 아파서 잠을 못 잘 텐데…’라고 하시는데 희한하게도 나는 안 아프다. 나는 정말 운동선수를 타고났다 보다”라며 빙그레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어깨 팔뚝 근육은 한눈에 봐도 굉장했다.

9일 동안 7개 종목 출전해 모두 완주
마라톤 풀코스보다 긴 거리 달린 셈
‘아이언맨’ 윤성빈이 칭찬한 철인
양쪽 어깨 인대 부상당하고도 투혼
“국가대표 선수라면 완주는 기본”

대표팀 코치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음 경기를 위해 포기하라고 해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국가대표 선수라면 완주는 기본입니다. 결코 대단한 게 아니죠.”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했으나, 그는 첫 경기부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기자들이 몰려들어 깜짝 놀랐어요. 리우에서 은메달을 땄을 때도 이러지 않았는데…. 한마디로 ‘뭐지?’ ‘왜지?’라고 반문했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통틀어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여름·겨울올림픽 무대에 모두 선 게 이유였지만, 46살의 적지 않은 나이, 장성한 세 딸의 엄마 등 스토리도 언론의 흥미를 자극했다.

전 종목 완주가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힘들었는데 좀 쉬니까 다시 운동하고 싶다. 스키 타고 싶어 죽겠다”며 크게 웃었다. 그에게 결승선은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나의 ‘쉼터’예요. 결승선만 통과하면 쉴 수 있잖아요. 이를 악물고 없는 힘까지 쥐어짜내서 질주해요. 훈련 때도 마찬가지예요.” ‘언제가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고된 훈련이 끝난 뒤요. 개운한 느낌이랄까?”

전북 익산시 마동 집 근처 공원에서 도로사이클 훈련을 하는 이도연 선수.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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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에서 추락해 하반신 마비

이도연 선수는 1972년 전북 정읍에서 4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만 셋이다. 아이들과 뛰어노는 게 마냥 좋았던 건강하고 씩씩한 어린이였다. 그는 “어린 시절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도 키 163㎝인데, “어렸을 때도 체구가 건장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다. 사고가 난 건 2월에 졸업하고 다음달인 3월 둘째 주였다. 건물에서 중심을 잃고 추락해 척추 장애를 입고 하반신이 마비됐다.

장녀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온 집안이 충격 속에 빠져들었다. 특히 어머니는 넋이 나갔다. 음식점을 운영하며 손님들과 상대해야 하는 어머니는 그 뒤로 무뚝뚝하고 말이 없어졌다. “딸이 저렇게 됐는데 뭐가 좋다고 남의 집 가서 웃고 있느냐며 남의 집 잔치엔 일절 가지 않으셨어요.”

그는 장애를 입은 이듬해, 21살에 사랑을 만나 두 살 터울로 세 딸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남편과 헤어졌다. 그는 사고 경위와 남편에 대한 얘기는 거의 꺼내지 않았다. “다 지나간 일이고, 지금 내가 이렇게 웃으며 살고 있으면 그만이지 않아요?”

여성, 장애인, 경제적 어려움…. 남편이 떠난 뒤 그는 하나도 벅찬 ‘사회적 약자’의 조건을 세 가지나 떠안았다. 장애를 지닌 몸으로 가사와 육아에만 전념하기도 어려운 일인데 거기다가 경제적 책임까지 져야 했다. 전자부품 조립부터 양말 실밥 떼기, 마스크 포장, 키보드 부품 끼우기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일하다 보니 욕창이 생기기도 했다. “눈물로 지새웠어요. 삶이 너무 힘들어 모든 걸 놓으려던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었죠.” 그 순간, 그를 잡아준 이들이 세 딸이다. 그는 딸들을 가리켜 ‘나의 생명줄’이라고 칭했다.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생명줄’ 아니냐”고.

30대 초반, 원불교에 귀의하면서 차츰 마음이 안정됐다. 그가 사는 전북 익산은 원불교 성지다. “저는 어떤 종교든 모두 좋다고 생각해요. 단지 제 경우에는 너무 힘들어 의지하고 싶을 때 원불교가 가장 가까이 있었을 뿐이죠.” 큰딸의 상담 선생님이 들려주던 원불교의 좋은 구절들이 생각나 원불교 교당을 찾아갔다고 했다.

4남매 중 맏딸…“어릴 땐 군인 꿈꿔”
고교 마치던 해 추락사고로 척추 마비
결혼해 두살 터울 세 딸 낳았으나
여성·장애인·경제적 어려움 떠안아
“운동 시작하며 비로소 정체성 찾아”

그의 마음을 다잡아준 또 하나가 바로 운동이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원래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인데 잊고 살다가 운동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정체성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사실 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내 정신 연령은 스무살에서 멈췄다”는 말도 덧붙였다.

2006년 처음 시작한 운동은 탁구였다. 밤 10시까지 라켓을 잡고 녹색테이블 위에서 탁구공과 씨름하며 구슬땀을 흘렸다. 집을 비우는 일도 잦아졌다.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됐다. 합숙훈련도 많았고, 지방이나 국외 원정경기도 잦았다. 1년에 대회가 10개는 됐다. 세 딸은 엄마 없는 집안일을 스스로 척척 알아서 했다. 세 딸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엄마의 빈자리를 스스로들 잘도 메웠다. “그래도 음식점을 하며 위아랫집에 살던 부모님의 도움이 컸죠.” 그는 “경제적으로는 막내 남동생이 큰 도움을 줬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운동하기 전에는 웃을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잖아요.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고 있으니 좋은 일이 오더라고요.”

그의 세 딸도 모두 웃는 낯이라고 했다. 특히 검찰 공무원인 큰딸에 대해선 “처음엔 교정직에 있었는데, 웃는 낯이 재소자들 앞에서 종종 오해를 사기도 했다”며 “그래서 지금은 행정직으로 옮겼다”고 귀띔했다.

탁구에 재미를 붙일 즈음, 그는 “무언가 더 역동적인 것을 찾다가” 육상으로 전향했다. 그런데 하필 투척 종목이었다. “사실 휠체어 레이싱(휠체어육상 단거리)에 관심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고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어요.” 이미 그의 나이 마흔살이었고, 당시 몸무게가 78㎏이었다. 휠체어 레이싱은 비장애인 종목으로 따지면 육상 100m나 마찬가지다. 그만큼 짜릿하고 박진감 넘치는 종목이다.

불혹에 시작한 투척 종목에서도 그는 군계일학이었다. 전국장애인체전에 나가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포환던지기 등 투척 세 종목에서 모두 한국신기록을 작성하며 3관왕에 올랐다. 하지만 투척 종목은 그의 운동 ‘끼’를 채우기엔 어딘가 2% 부족했다. “투척 종목도 역동적이었지만 솔직히 재미가 없어서 다른 종목에 더 욕심이 났죠.” 그가 새로 찾은 종목은 핸드사이클. 누워서 손으로 바퀴를 돌리는, ‘거꾸로 타는 사이클’이다. 하반신 장애인은 발이 아닌 손으로 페달을 돌려 자전거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핸드사이클’이다. 팔의 힘으로만 돌려도 시속 60㎞까지 나온다.

그런데 사이클 한 대 가격이 1천만~2천만원이나 했다. 끙끙 앓으며 고민하던 그에게 어머니 김삼순(71)씨가 아무 말 없이 거액의 돈을 내밀었다. 1800만원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돈으로 사이클을 장만했고, 이후 ‘날개 단 말’처럼 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또 달렸다. 핸드사이클은 그의 적성에 딱 맞는 종목이었다. 거칠 게 없었다. 국내 대회를 모두 휩쓸었고, 2014년 인천장애인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2개를 따냈다. 이어 44살에 출전한 2016 리우여름패럴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도연 선수 가족들이 전북 익산 마동 집 근처 공원에 모여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그렸다. 왼쪽부터 큰딸(유선), 아버지 이민형씨, 이도연 선수, 막내딸(유휘).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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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현 선수 소개로 노르딕스키 시작

이도연 선수는 한국 겨울패럴림픽 사상 첫 금메달의 주인공인 신의현 선수와 친남매처럼 가깝다. “같은 시골 출신의 촌사람이라 그런지 운동을 하면서 허물없이 금세 가까워졌어요.” 핸드사이클을 먼저 시작한 그는 자신보다 2년가량 늦게 핸드사이클에 입문한 신의현 선수에게 “너는 여자보다도 느리냐”며 놀려대곤 했다. 그는 “의현이 부모님이 의현이에게 ‘도대체 어떤 여자길래 너를 이기느냐’고 말할 정도였다”며 깔깔 웃었다.

2016년 9월, 리우패럴림픽이 끝난 뒤 이도연 선수의 가슴속엔 꿈 하나가 생겼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평창패럴림픽에 출전하고 싶다.’ 하지만 겨울 종목은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때 주종목이 노르딕스키인 신의현 선수가 “누나가 하면 잘할 것 같다”며 스키를 권유했다. 평창패럴림픽이 1년 반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도연 선수는 스키 스틱을 손에 쥐자마자 타고난 체력과 어깨 힘으로 승승장구했고, 어느새 그의 가슴엔 태극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의현이가 큰 힘이 됐다. 의현이 덕분에 스키를 빨리 배울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어머니가 내민 돈으로 산 사이클
리우여름패럴림픽에서 은메달 따
신의현 “잘할 것 같다”며 스키 권유
평창서 딸 또래 선수들과 당당히 경주
“아시아 선수 중 가장 앞서자 다짐”

평창의 설원에서 그는 딸뻘 되는 선수들과 당당히 경쟁했다. 평창패럴림픽 여자 노르딕스키 2관왕에 오른 미국 켄들 그레치(26)와는 무려 20살 차이다. 딸들 또래의 어린 선수들과 레이스를 펼치면서도 그는 “일본과 중국 선수에게는 뒤지지 말자, 아시아 선수 중에서는 가장 앞서가자”고 다짐했다. 실제 그는 7개 출전 종목에서 모두 중하위권에 머물렀지만, 그의 뒤에는 항상 중국이나 일본 선수가 있었다. “외국 나가서 경기할 때 나보다 앞섰던 서양 선수도 이번엔 많이 제쳤다”며 흐뭇해했다.

그에게 태극기는 각별하다. 단순한 애국심 이상이다. “태극기랑 이야기해보셨어요? 저는 태극기랑 대화를 해요. 폐막식 때 태극기 들었는데 ‘내가 너를 안고 있으니 너무 좋다’고 했어요. 평소에는 태극기한테 ‘언젠가 너를 게양대에 꼭 올리겠다’고 하죠.” 패럴림픽에서 반드시 메달을 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경기에 나설 때 장비와도 대화를 한다고 했다. “장비야! 너는 내 몸의 엔진이다. 내가 할 몫은 알아서 잘할 테니 너는 잘 달려만 다오. 오늘도 한번 잘 달려보자”고 한단다. 그는 사실 장비 때문에 상심이 컸다. 피겨스케이팅 여자싱글 최다빈 선수가 발에 맞지 않는 부츠 때문에 고생했듯이, 그도 몸에 맞지 않는 좌식스키 때문에 패럴림픽 직전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 패럴림픽을 불과 두달 앞둔 지난 1월 초에야 이 선수에게 딱 맞는 장비를 찾았다. “장애인 선수에게 장비는 신체의 일부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동안 열심히 노력은 했는데 맞지 않는 장비 때문에 숱하게 넘어졌어요.”

그에게 평창 하면 떠오르는 장면을 물었더니, 뜻밖에도 넘어져서 창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딱 두번 넘어졌어요. 첫날 긴장해서 넘어졌고, 두번째는 뭔가에 걸려서 넘어졌지요. 얼마나 창피하던지….”

하지만 불혹을 훌쩍 넘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끊임없는 도전정신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자극을 주고 있다. 은퇴를 고민하던 한 선수는 이도연 선수를 보며 은퇴를 미뤘고, ‘도전과 미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한 젊은 선수는 그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힘들어서 웃을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전하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가능하다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도연 선수가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지만, 2010 밴쿠버겨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금메달리스트인 모태범 선수는 최근 스케이트화를 벗고 여름종목인 사이클로 전향을 선언해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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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모습 보이지 않는 바위 같은 분”

이도연 선수의 세 딸은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그는 “딸들은 어렸을 때부터 장애인 엄마를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길을 가다 친구를 만나도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에 탄 엄마를, 친구들한테 ‘우리 엄마야’ 하며 스스럼없이 소개했다고 한다. “세 딸은 자립심이 강해요. 모든 일은 각자 다 알아서 하죠.” 두 살씩 터울이 나지만 막내가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가 둘째와 막내는 한 학년 차이다. 큰딸과 막내딸은 세 학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큰딸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막내가 입학해 교복을 물려받았다.

세 딸의 성격을 묻자 이도연 선수는 “셋 다 다르다”며 빙긋 웃었다. 대뜸 “남편 같은 보호자는 막내”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집안에 정전이 되거나 가전제품이 고장나면 해결사는 늘 막내였단다. “둘째는 정이 많고, 큰딸은 의젓하고 든든하다. 참 재미있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큰딸도 7살 때부터 유도를 하다가 중학교 때 그만뒀다. “어릴 적 나처럼 경찰이나 군인 같은 제복 입은 직업을 선망했다”고 했다. 결국 큰딸 유선씨는 검찰 공무원이 됐다. 둘째딸도 어릴 적 유도를 했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할 때 적성에 맞지 않는 학과를 택하는 바람에 현재 휴학 중이고, 동물을 좋아해 관련된 학과를 찾고 있다. 막내딸만 운동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정작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아 운동에 소질을 보인 딸이 막내라고 했다. 막내딸은 대학에서 식물생명공학을 전공하면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큰딸은 직장이 전주이고, 막내딸은 학교가 광주인데 시험 준비 때문에 더 바빠서 요즘엔 주말조차 네 가족이 모두 모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도연 선수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는 ‘내 자신을 믿자’다. 그는 딸들에게 늘 ‘강한 엄마’다. 딸들이 어릴 적부터 “약해지지 말고 바르고 강하게 자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녀 유선씨는 “엄마는 딸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바위 같은 분”이라고 했다. 막내딸 유휘씨도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정 많고 마음 약한 둘째딸 유준씨는 “엄마가 경기 도중 넘어지는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애써 웃는다. 하지만 나는 속상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평창패럴림픽 폐막 하루 전인 3월17일. 이날 토요일을 맞아 세 딸은 물론이고 이 선수의 아버지 이민형(74)씨와 어머니, 세 남동생, 사촌들까지 대가족이 모두 평창을 방문했다. 이 선수의 만류에도 가족들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잘한 날이었어요.” 23명이 나선 크로스컨트리 여자 5㎞ 좌식경기에서 그는 15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뒤에 8명이나 남겨뒀다. 가족들은 이 선수의 역주에 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이 선수의 동생들은 “누나가 정말 자랑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첫째 동생인 이재평(45)씨는 “학창 시절,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왔다가 누나가 집에 있으면 미안해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누나가 운동을 시작한 뒤 성격도 달라지고 표정도 밝아져서 집안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전했다. 막내 동생 이재국(38)씨는 “누나가 신문과 방송에 나오는 게 신기하다”며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도전을 거듭하는 누나가 참 존경스럽다”고 했다.

이도연 선수는 평창패럴림픽이 끝난 뒤 지난달 27일부터 2박3일간 둘째딸 유준씨와 함께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딸이 엄마의 휠체어를 밀면서 다정하게 명동 거리를 거닐었고, 쇼핑센터와 백화점도 다녔다. 이 선수는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이도연 선수가 지난달 27일 둘째딸(유준)과 함께 서울 명동 거리를 거닐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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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나게 떨렸다”…폐막식 태극기 운반의 순간

이도연 선수는 평창겨울패럴림픽 폐막식날 대회를 빛낸 한국 선수 6명에 뽑혀 태극기를 국기 게양대까지 운반하는 의식에 참여했다. 이 선수를 비롯해 방민자(휠체어컬링), 이치원(알파인스키), 박항승(스노보드), 이정민(노르딕스키), 장동신(아이스하키)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그날 겁나게 떨렸다”고 했다. 경기에 나설 때도 전혀 떨지 않는 강심장인 그도 폐막식의 웅장함과 화려함 앞에선 주눅이 들었다. “그날 저 어땠어요? 원래 화장을 안 하는데 그날 화장한 제 모습이 가장 예뻤다고들 하데요. 하하하!”

이도연 선수는 이제 또다른 목표를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 2020년 도쿄패럴림픽 핸드사이클 로드레이스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 2016년 리우패럴림픽 은메달이 아쉬움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때 충분히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경험이 조금 부족했어요.” 그는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전초전’에 이상이 생긴 상태. 올가을 자카르타·팔렘방 장애인아시안게임에 출전하려고 했지만, 그 종목이 없어져 버려서다. 그는 또 “다른 일은 욕심도 없고 잘 양보하는 편인데, 운동만큼은 욕심이 많다”며 “기회가 되면 휠체어 레이싱과 조정을 꼭 해보고 싶다”는 포부도 드러냈다.

운동 욕심 많은 그에게 조심스레 은퇴 시기를 물었다. “내 몸이 운동선수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리고 나보다 더 훌륭한 후배가 나왔을 때 물러날 거예요.” 의외로 평범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도 “그때까지는 열심히 운동하겠다”고 다짐했다. 적어도 2020년 도쿄여름패럴림픽과 2022년 베이징겨울패럴림픽까지는 그의 무대가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운동만큼은 욕심 많아, 기회 되면
휠체어레이싱과 조정에 도전할 것”
올해 3월 늦깎이 대학생 꿈 이뤄
장애인레저스포츠 전공해 새 출발
“장애인 집 밖으로 끌어내고 싶어”

이도연 선수는 올해 대학 신입생이 됐다. 지난 3월 한국복지대학 장애인레저스포츠학과에 입학하며 오랜 꿈을 이뤘다. “우리 집에 대학생이 셋이에요.” 그가 활짝 웃었다. 그는 “둘째딸이 수강신청 방법이며, 이것저것 큰 도움을 주고 있다”며 “패럴림픽 출전 때문에 3월에 거의 수업에 못 들어간 게 아쉽다”고 했다.

학교에 가려면 전북 익산 집에서 경기도 평택의 학교까지 왕복 3시간을 운전하면서 다녀야 한다. 그는 “월요일 빼고 매일 수업이 있어서 운동하며 공부한다는 게 벅찬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회가 왔을 때 공부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장래 꿈은 장애인 상담사다. 과거 자신처럼 꿈을 펴지 못했던 장애인을 “집 밖으로 끌어내고 싶다”고 했다. “불운을 원망하기보다 남을 미워하기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져요.”

그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고 ‘인과응보’라는 세 가지 말을 좋아한다. 세 가지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져 극단적인 생각까지 한 힘겨운 삶에서 체득한 좌우명이다. 비록 넘어지고 쓰러질지언정 그의 삶에 결코 포기는 없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 ‘포기’라는 단어는 이미 잊힌 지 오래인지 모른다. 그래서 ‘위대한 엄마’의 아름다운 질주는 현재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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