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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12 11:41 수정 : 2018.09.12 21:33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피해자 ‘숙제하듯’ 저녁식사 자리 요청 응해”
“성관계 당시 심리적 얼어붙음 상태로 보여”
전후 맥락 따져 합의하 관계 아니라고 봐
“이성적 호감이 생길 사정도 보이지않아”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법원의 상징인 '정의의 여신상'이 보인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업무상 관계가 있는 여성 직원을 대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관계를 맺은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는 김문환 전 에티오피아 대사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에 무죄 판단을 내린 서울서부지법의 1심 판단과 대비된다.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13단독 박주영 판사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으로 기소된 김문환(54) 전 에티오피아 대사에 징역 1년을 선고했다. 40시간의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이수, 3년간 아동·청소년 관계 기관 취업 제한 명령도 내렸다. 김 전 대사는 선고공판이 끝난 뒤 법정 구속됐다. 김문환 전 대사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여성 직원 1명과 성관계를 맺고 두 차례에 걸쳐 다른 여성 2명을 추행한 혐의(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등)로 기소됐다.

박 판사는 김 전 대사가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를 간음한 혐의가 충분히 인정된다고 봤다. 사건의 전후 맥락을 따졌을 때 김 전 대사를 ‘모셔야’했던 피해자가 성관계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을 뿐 호감에 의해 자의적으로 맺은 관계가 아니라고 봤다. 사건 발생 당일 피해자는 “숙제하듯 의무적으로 저녁식사 요청에 응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사는 업무 외에 회식 명목의 자리를 자주 마련했는데 피해자를 비롯한 직원들은 평소 김 전 대사의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 전 대사는 간음 행위가 있기 전 두 차례 신체 접촉이 있었던 점을 들어 ‘피해자가 나의 행동을 받아줬다 생각했다’, ‘이성적 호감이 있었다’고 반박했지만 박 판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추행 당시 기분이 나빴지만 따져 묻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멍했고 무서웠다”는 피해자 진술과 김 전 대사의 지위 등을 고려하면 김 전 대사를 소위 ‘모셔야’하는 피해자가 그 자리에서 추행 사실을 지적하며 단호하게 항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본 것이다. 박 판사는 “갑자기 이성적 호감이 생길만한 어떤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가 아무런 행동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고 하는데 어떤 행동을 보고 이성적으로 받아줬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성관계 당시 피해자가 보인 태도도 유죄 판단에 고려됐다. 박 판사는 성관계 당시 피해자가 불안과 공포로 인해 심리적으로 얼어붙은 상태에 있었다고 봤다. 박 판사는 “피해자는 법정에서 ‘온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는 취지로 진술했고 피고인 또한 성관계 당시 피해자가 어떤 말이나 반응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며 “피해자가 이성적인 감정으로 성관계 요구에 응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왜 저항하지 못했냐’는 수사기관의 질문에 피해자가 “평소에 ‘대사님’이라고 굽신거렸던 것이 저도 모르게 몸에 익어버렸던 것 같다”고 진술한 점도 유죄 판단에 고려됐다.

재판부는 “피해자에 허위 진술할 만한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명확히 밝혔다. 당시 피해자가 본인은 가만히 있었다는 점에 대해 크게 자책하고 있는 점, 사건 발생 이후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 점, 여전히 심리상담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점, 처음에는 피해자가 오히려 진술하기 꺼려한 점 등을 고려하면 피해자가 허위로 진술할만한 사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재판부는 다른 여성 직원 한 명에 대한 추행 혐의도 인정했다. 공소사실에 대한 직접 증거는 법정에서의 피해자 진술뿐이었지만, 김 전 대사가 추행에 이르게 된 경위나 추행 당시 보인 행동, 구체적 언행 등에 대해 피해자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돼 신빙성이 있다고 봤다. 다만 다른 여성 직원 한 명에 대한 추행 혐의는 피해자의 직접 진술이 아닌 그 진술을 기록한 증거만 있어 혐의 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 판단을 내렸다.

박 판사는 “피고인은 재외공관장으로서 해외 거주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관계기관과 협력해 한국의 위상을 드높일 책임이 있다”며 “그럼에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업무상 지휘 감독 관계에 있는 피해자들을 추행하고 간음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은 별다른 죄의식 없이 대범하게 성폭력 행위를 저질렀고 그 행위가 간음에까지 나아갔다는 점을 보면 죄질이 매우 불량하고 죄책이 무겁다”고 질책했다. 박 판사는 무엇보다 “피해자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런데도 용기 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진술했고 그 과정에서 또 한 번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렸다”며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고 정당화하며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하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김 전 대사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같은 혐의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무죄를 선고한 서울서부지법 1심 재판부와 차이를 보인다. 당시 김씨는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낀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첫번째 간음 행위를 포함해 11가지 공소사실 모두에 무죄 판단을 내렸다.

김지은씨는 재판 과정에서 첫 간음이 발생하기 몇시간 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강가에서 요트를 타던 중 안 전 지사로부터 첫 신체접촉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대로라면 무의식적으로나마 피고인을 경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연이어 발생한 신체접촉과 간음 행위에 고개를 숙인 채 ‘아니에요’라고 중얼거리며 소극적으로만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피해자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안 전 지사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는 ‘심리적 얼어붙음’ 등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지나치게 폭 좁게 판단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첫 번째 간음행위가 발생했을 때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안자 김씨가 맥주를 스스로 내려놓은 점, ‘나를 안으라’는 안 전 지사의 요구에 안 전 지사를 살짝 안은 점을 들며 김씨는 심리적 얼어붙음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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