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0.02 15:07
수정 : 2018.10.02 18:55
김영희 논설위원
“계단, 거실, 침실, 오른편 침대… 웃음소리, 떠들썩한 웃음소리… 그리고 빠져나오려던 몇번의 시도, 마침내 빠져나온 것.”
낮은 목소리로 뱉는 단어 하나하나 고통이 배어 있는 듯했다. 36년 전 그날, 가장 잊히지 않는 게 뭐냐는 물음에 대한 크리스틴 포드(51) 팰로앨토대 교수의 답변이었다. 브렛 캐버노(53)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성폭행 시도 의혹을 다룬 상원 청문회가 열린 지난달 27일, 휴대전화로 무심코 생중계에 접속했다가 결국 밤을 꼴딱 새워버렸다. 캐버노 의혹을 둘러싼 논란이 올해 한국 사회를 보는 양, 기시감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지난해 10월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범죄를 폭로하며 불붙은 ‘#미투’ 1년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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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포드 교수가 지난달 27일(현지시각)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브랫 캐버노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36년 전 성폭행 시도를 증언하기 앞서 선서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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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익명 제보자였던 포드의 실명이 공개된 뒤, 그는 용기에 대한 찬사만큼이나 거센 의혹과 비난에 휩싸였다. 누구 집 파티였는지도 모르는 정확하지 않은 기억, 사실이더라도 ‘기껏해야’ 17살 소년들이 벌인 성폭행 ‘미수’를 갖고 대법관 후보자를 끌어내리려는 건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책 팔기 상술이네, 법률 비용을 조지 소로스가 댔네, 포드가 민주당의 거액 기부자네, 6년 전 상담소에 간 건 기록을 남기려는 치밀한 계획이네 같은 음모론과 가짜뉴스가 에스엔에스를 달궜다. 세상을 뒤흔든 #미투라지만, 피해자에게 ‘왜 이제서야’라는 질문이 집요하게 되돌아오는 것도 그대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여성들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포드의 말처럼 그리 나쁜 공격이었다면 왜 그때 고발 안 했나’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는 즉각 ‘#왜 나는 고발 안 했나’(#WhyIDidntReport)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불과 이틀 새 67만5천건에 이 해시태그가 붙었다. 알리사 밀라노, 대릴 해나 같은 배우들이 10대 시절 말 못 했던 성폭력 피해를 고백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의 딸인 작가 패티 데이비스가 40년 전 성폭행 피해와 그런 기억이 피해자에게 어떻게 각인되는지 털어놓은 <워싱턴 포스트> 기고는 강렬했다.
이번 논란이 캐버노 의혹의 사실 검증을 넘어 ‘미국이 두쪽 났다’고 표현할 정도로 과열되는 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거대한 싸움이 배경에 있는 탓 또한 크다. 한국에서도 논쟁중인 낙태죄가 핵심이다. 임신 초기 석달은 무조건, 주에 따라 여섯달까지 여성의 낙태를 허용한 1973년 연방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보수 기독교 등 반낙태 진영은 ‘재앙’ 같은 이 판결의 무력화에 수십년간 앞장서 부분적인 성공을 거뒀다. 젊은 보수파 법조인의 양성·지원 전략도 폈는데, 지난해 트럼프가 지명한 닐 고서치 대법관과 캐버노가 그들이다. 특히 강경 반낙태론자인 캐버노가 종신 대법관이 되면 보수 대 진보는 5 대 4, 아예 이 판결을 뒤집을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캐버노에 대한 상원 전체의 인준 표결은 포드 증언의 반향으로 연방수사국의 수사가 개시되면서 며칠 연기됐다. 중간선거를 앞둔 공화당과 민주당이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지금, 결국 의석 분포대로 아슬아슬 통과될 가능성이 적잖다.
하지만 #미투가 힘이 센 건 유명인 가해자를 단번에 무너뜨려서도, 매번 ‘승리’해서도 아니다. 파괴됐던 피해자의 인격과 존엄을 되찾는 과정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포드의 증언은 계속 재생되고 공유되며 더 많은 여성, 그리고 남성들을 바꿔놓을 것이다. 85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은 청문회 전날 조지타운대 강연에서 말했다. “우리 세대는 ‘남자는 결국 남자야’라는 말에 어쩔 도리가 없다고 여겼다. 이제 그딴 생각에서 벗어나라.” 이렇게 #미투는 전진한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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