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10.08 15:35 수정 : 2018.10.08 19:57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한국을 찾은 스웨덴의 배우 수잔나 딜버는 스웨덴의 ‘미투’ 운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소개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여성 배우 500여명 뭉쳐 ‘미투’ 고발한 스웨덴
가해자 실명 폭로 대신 익명 고발 원칙 세워
“특정 개인이 아닌 구조에 초점 맞추고 싶었다”
정부 즉각 응답하고 증명은 가해자 몫으로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한국을 찾은 스웨덴의 배우 수잔나 딜버는 스웨덴의 ‘미투’ 운동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소개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법과 제도가 자연스럽게 일상의 변화를 가져오진 않는다는 걸, 스웨덴의 ‘미투’ 운동이 보여줬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성평등 국가로 꼽히는 나라, 장관의 절반과 국회의원의 40%가 여성인 ‘페미니스트 정부’를 가졌던 나라, 성별에 근거한 차별을 법으로 금지하는 나라, 부인이 잠들었을 때 성관계를 시도하면 강간으로 간주되는 나라, 남녀의 급여 차이가 가장 적은 나라인 스웨덴에서도 “우리는 성폭력에 충분히 시달렸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난해 11월의 일이다.

연출가 이윤택·오태석 등에 대한 ‘미투’가 터져 나왔던 한국의 공연계처럼, 스웨덴에서도 연극·영화계 배우 500여명이 동참한 성폭력 고발이 ‘미투’의 불꽃을 태우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평등’을 둘러싼 수많은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과 관련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무대 위의 남성과 여성 배우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남성들은 보통 더 재능이 있고, 더 진지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여성은 단지 ‘여성’일 뿐이고, 남성은 ‘인간’이 되죠. 여성은 ‘여성의 이야기’를 하지만, 남성은 마치 ‘전 인류’의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고요. 나이 많은 남성 배우는 경험이 많고 존경받아야만 하지만, 나이 많은 여성 배우는 조금 애처로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존재로 여깁니다. 여성의 가치가 주로 남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당시 ‘미투’ 운동에 참여했던 배우 수잔나 딜버가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스웨덴 공연·예술배우연맹 배우 부문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국의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부산문화예술계반성폭력연대’,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등과 함께한 토론회에 참석해, 스웨덴의 ‘미투’ 운동을 소개했다. 딜버 의장이 전한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한국과 어떻게 다를까. 5일 부산, 7일 서울에서 열린 두 차례의 토론회를 통해 그가 소개한 스웨덴 ‘미투’ 운동의 특징을 짚어본다.

■ 사람 대신 구조를, 익명으로 고발하다

스웨덴의 ‘미투’ 고발은 대부분 피해자도 가해자도 익명인 채로 진행됐다. 또 피해자 개인이 나서기보다는 집단이 공동으로 목소리를 내는데 초점을 맞췄다. 처음 이런 발화 형식을 택한 건 여성 배우들이다. 이들은 개인이 가해자를 공개적으로 지목하는 대신 피해자가 뭉쳐 함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택했다. 페이스북 비밀 그룹을 만들어 동료 배우를 초대했고, 각자의 경험을 공유했다. 이틀 새 5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였다. 피해 당사자가 직접 언론에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개인 신상이 드러나는 걸 감수한 채 ‘미투’ 폭로를 해야 했던 한국과는 사뭇 다르다. 딜버 의장 역시 “피해자 여러 명이 모여 익명으로 고발한 점이 한국의 ‘미투’와 가장 큰 차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여러 운동 조직이 존재하고, 개별적인 협상보다 집단으로 행동하는 데 익숙한 스웨덴의 문화가 그 배경이 됐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자매와 같은 강한 연대감을 가졌어요. 중요한 건 우리 개인의 경험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각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가 아니었죠. 우리는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데도 남자들을 더 선호하는 구조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 결국 우리 모두 ‘남자들만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건 어느 한 개인이 유명해지거나 존경받는다고 없앨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어요. 모든 곳이 같았습니다.”

익명의 증언이 모여 지난해 11월 배우 457명이 함께 서명한 고발 기사가 나왔다. 딜버 의장은 “우리는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만연해있는지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 구조의 문제, ‘여성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발자 1명을 비판하는 것보단 500명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어려울 테니까요.” 딜버 의장의 말이다.

■ 정부와 사회는 즉각 응답했다

한국과 다른 건 발화 양상과 형식뿐만이 아니다. 정부와 사회가 ‘미투’에 응답한 방식은 한층 생경하다. 고발 기사가 보도된 당일, 문화·민주주의 담당 장관(The minister of Culture and Democracy)은 국립극장의 경영진들을 소집했다. 노동조합인 ‘예술영화인조합’과 고용주들이 속한 ‘스웨덴 공연예술협회’는 함께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즉시 구성했다. 일주일 뒤 스웨덴의 몇몇 극장에서 배우들이 익명의 증언을 낭독하는 행사를 열었을 때, 업계의 주요 결정권자부터 정치인까지 낭독회에 초대됐다. 이날 행사에는 스웨덴의 여왕과 공주도 자리했다.

집단으로 미투를 발화하는 방식은 곧 다른 여성 직업군으로 번졌다. 며칠 뒤 오페라 가수 700여명의 증언이 나왔다. 변호사 6000여명, 음악계 종사자 2000여명의 고발도 잇따랐다. 기술자, 건설 노동자, 언론인, 교사, 운동선수, 무용수, 심리학자, 학자, 소방관, 군인, 식당종업원, 사회복지사, 코미디언, 경찰, 목사, 그리고 정치인까지 65개 분야에서 여성들이 모였고, 자신이 겪은 일을 증언했다.

“이런 현상은 예술계의 성폭력이 단지 몇몇 ‘천재적인’ 가해자들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말하는 행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딜버 의장은 말했다. “우리가 초점을 둔 것은 구조의 문제였습니다. 구조는 어떤 가해자보다 큰 적입니다. 남성들에게 ‘그렇게 행동해도 된다’고 허용해오던 구조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우리 모두와 미래 세대에까지 중요한 일이었지요.”

연극계 ‘미투’ 이후 만들어진 한국의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관계자들과 만난 수잔나 딜버는 “자매애(sisterhood)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제공

■ 증명도, 설명도 가해자의 몫이 됐다

곧이어 제도적인 뒷받침이 이어졌다. 스웨덴의 예술영화인조합과 공연예술협회는 양쪽이 함께 참여하는 ‘평등과 다양성을 위한 위원회’를 만들고, 성희롱·성폭력에 대한 규범을 새로 갱신했다. 예술인 노조가 지난해 11월 마련했던 성폭력 관련 신고 창구도 계속 유지키로 했다. 공연기관들은 모든 형태의 괴롭힘과 성폭력에 대한 정책, 피해자가 발생할 경우의 대처 방안을 전면 재검토했다.

‘미투’ 이후 스웨덴에선 90% 이상의 극단이 연습 첫날 성폭력 방지 관련 규범을 함께 큰 소리로 낭독한 뒤에 연습을 시작한다.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동의 여부’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담은 법안도 마련됐다. ‘미투’ 이후 관련 법안만 130건가량 발의됐지만 국회 통과는커녕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성관계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면, 이제 (조사 단계에서) 피해자가 더 이상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상대로부터 동의를 얻었는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설명하는 건 가해 당사자의 몫이 됐죠. 사소할 순 있지만 아주 중요한 진전이라고 생각해요.”

■ 남성은 연대하고 지지했다

“여기서도 백래시(반격)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에요.” 스웨덴에서도 익명의 고발 기사를 토대로 피해자가 누구인지 추측해보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2차 가해도 발생했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반응이 부정적인 반응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미투’가 연극영화계 전반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었던 건 동료를 향한 폭력에 괴로워하며, 그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남성 동료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딜버 의장은 강조했다.

남성의 높은 지지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우선 스웨덴의 미투 운동이 과거 성폭력이 일어났을 때 침묵과 방관이 이어진 일들을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대상을 특정 개인이 아닌 사회 구조에 집중한 점을 원인으로 꼽았다. 미투 운동을 남성 개인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구조의 부조리함을 함께 개선해 나가는 방식으로 받아들였다는 설명이다. 또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처럼 고정된 성 역할을 깨는 게 남성들에게도 얼마나 이로운지 깨달은 사람들이 스웨덴 사회에 많이 존재한다는 점도 그 이유로 꼽았다. “(스웨덴에서는) 유치원 때부터 ‘젠더’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어요. 일찍 시작하는 편이죠. 이런 교육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가 ‘미투’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 조성에 일조했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폭발적으로 발화한 ‘미투’는 아직 어떠한 제도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윤택 연출가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은 것 정도가 거의 유일한 변화로 꼽힌다. 대신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거나 2차 가해를 일삼는 일은 더욱 빈번해졌다. 이런 현실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 딜버 의장은 이렇게 답했다.

“일단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당연히 가해자는 누군가의 아버지나 형제, 친구일 수 있죠. 그래서 쉽게 가해자를 비난하거나 가해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이 문제는 (가해 당사자가) ‘누구’라는 게 문제가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피해자가 되는 일은 그 자체로 사회적인 주목과 부끄러움 등을 직면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거짓으로 피해자가 되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