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지방법원 판사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두 여인에게 주라. 솔로몬 대왕의 중간판결이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은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한 여인은 아이를 살려 저 여인에게 주라 청하고, 다른 여인은 아이를 반으로 나눠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게 해 달라 청한다. 솔로몬은 두 여인의 반응을 듣고 최종 판결을 내린다. 산 아이를 저 여자(아이를 살려 달라 청한 여인)에게 주라, 그가 아이의 어머니이니라. 성경에 나온 재판이지만 종교와 관계없이 지혜로운 재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솔로몬 재판은 현재 우리나라 판사들이 할 수 없는 재판이다. 어떤 여인이 한 아이와 다른 여인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하고 그 다른 여인이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재판이 벌어진다면? 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사자들의 주장을 경청한 뒤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출해 주세요.” 하나 더 덧붙인다면, “주장을 법리에 맞춰 재구성해 주세요.” 솔로몬 재판처럼 재판 당사자들을 속여 가며 아이를 칼로 가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주기도문의 어느 구절처럼 신이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판사는 그저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고 증거를 살피고 법리로 주장을 판단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입증이 되었는가, 법에 따라 인용 가능한가(또는 유죄가 성립되는가)만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 재판에 전지전능이란 없으며 전율이 흐르는 드라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놀랍게도 ‘진실 규명’ 또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 판사는 신이 아니고 초능력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에 임하는 판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에 불과하다. 평범한 한 인간이, 특정 사안에 대해 재판 과정에서 제출된 증거와 주장만을 놓고 (엉덩이 쥐나게 재판하며)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법리를 해석하여 어떠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 이것이 재판이다. 당연히 그 재판이 신의 판단처럼 무오류일 가능성은 없다. 그 재판 결과를 믿어야 할 어떤 절대적 이유도 없다. 다만 우리는 온갖 분쟁과 범죄에 대해 ‘이게 맞다고 치고’ 결론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 없는 제3자에게 판단 권한을 부여한 뒤 그가 내린 판단이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 내린 것인 이상 그 판단을 끝으로 더 이상 다투지 말자고 합의했을 뿐이다. 따라서 재판에 대한 신뢰의 근거는 유리처럼 약하다. 인간들은 재판의 종국적 힘을 유지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신의 권위를 빌려 신관에게 재판을 맡기기도 하고, 권력을 빌려 왕에게 재판을 맡기기도 했다. 신탁이 그러했고, 솔로몬 재판이 그러했으며, 원님 재판이 그러했고, 마녀재판이 그러했다. 당시의 재판 결과가 진실에 가깝진 않았지만 신과 권력을 업은 재판의 힘은 막강했다. 현대 국가에서는 재판에 위와 같은 신과 권력의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법치주의’라는 통치 철학을 만들어 재판에 권위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법치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 재판은 어떤 조건하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걸까. 판사로 재직하면서,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주어진 권한이 무겁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우리 사회가 이 권한에 바라는 소망이 만일 솔로몬 재판이나 신탁과도 같은 ‘절대적 진실 규명’ 내지 ‘절대적 정의 구현’이라면, 그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인가. 특히 헌법이 채택한 법치주의는 ‘재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건만, 우리 사회는 어느덧 재판의 신뢰와 권위 확보를 위하여 법치주의를 새로운 신화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 아닌지, 그 신화에 기대어 그 옛날 신탁처럼 재판에 대한 신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사법농단이 발생했다. 합리적 근거 없이 판사라는 이유만으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합당한 정의를 구현하는 판단만을 할 것이라는 신뢰를 받아오던 판사들도 사실은 평범하고 흔들리는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판사들은 신관의 위치에서 인간의 위치로 내려오게 되었다.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의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예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온 나는 한 사람의 판사로서 그리고 한 명의 시민으로서 지면을 통해 고민을 공유하고 답을 함께 찾아가보려 한다. 이 여정에 즐겁게 동행해 주시길 바란다.
칼럼 |
[세상 읽기]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 / 류영재 |
춘천지방법원 판사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두 여인에게 주라. 솔로몬 대왕의 중간판결이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은 상반된 반응을 보인다. 한 여인은 아이를 살려 저 여인에게 주라 청하고, 다른 여인은 아이를 반으로 나눠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게 해 달라 청한다. 솔로몬은 두 여인의 반응을 듣고 최종 판결을 내린다. 산 아이를 저 여자(아이를 살려 달라 청한 여인)에게 주라, 그가 아이의 어머니이니라. 성경에 나온 재판이지만 종교와 관계없이 지혜로운 재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솔로몬 재판은 현재 우리나라 판사들이 할 수 없는 재판이다. 어떤 여인이 한 아이와 다른 여인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하고 그 다른 여인이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재판이 벌어진다면? 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당사자들의 주장을 경청한 뒤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출해 주세요.” 하나 더 덧붙인다면, “주장을 법리에 맞춰 재구성해 주세요.” 솔로몬 재판처럼 재판 당사자들을 속여 가며 아이를 칼로 가르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은 주기도문의 어느 구절처럼 신이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판사는 그저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고 증거를 살피고 법리로 주장을 판단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입증이 되었는가, 법에 따라 인용 가능한가(또는 유죄가 성립되는가)만을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현대 재판에 전지전능이란 없으며 전율이 흐르는 드라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은 놀랍게도 ‘진실 규명’ 또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없다. 판사는 신이 아니고 초능력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에 임하는 판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제3자에 불과하다. 평범한 한 인간이, 특정 사안에 대해 재판 과정에서 제출된 증거와 주장만을 놓고 (엉덩이 쥐나게 재판하며)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법리를 해석하여 어떠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 이것이 재판이다. 당연히 그 재판이 신의 판단처럼 무오류일 가능성은 없다. 그 재판 결과를 믿어야 할 어떤 절대적 이유도 없다. 다만 우리는 온갖 분쟁과 범죄에 대해 ‘이게 맞다고 치고’ 결론을 내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 없는 제3자에게 판단 권한을 부여한 뒤 그가 내린 판단이 공정하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 내린 것인 이상 그 판단을 끝으로 더 이상 다투지 말자고 합의했을 뿐이다. 따라서 재판에 대한 신뢰의 근거는 유리처럼 약하다. 인간들은 재판의 종국적 힘을 유지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신의 권위를 빌려 신관에게 재판을 맡기기도 하고, 권력을 빌려 왕에게 재판을 맡기기도 했다. 신탁이 그러했고, 솔로몬 재판이 그러했으며, 원님 재판이 그러했고, 마녀재판이 그러했다. 당시의 재판 결과가 진실에 가깝진 않았지만 신과 권력을 업은 재판의 힘은 막강했다. 현대 국가에서는 재판에 위와 같은 신과 권력의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 대신 ‘법치주의’라는 통치 철학을 만들어 재판에 권위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법치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 재판은 어떤 조건하에서 신뢰받을 수 있는 걸까. 판사로 재직하면서, 특별할 것 없는 나에게 주어진 권한이 무겁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우리 사회가 이 권한에 바라는 소망이 만일 솔로몬 재판이나 신탁과도 같은 ‘절대적 진실 규명’ 내지 ‘절대적 정의 구현’이라면, 그 소망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소망인가. 특히 헌법이 채택한 법치주의는 ‘재판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건만, 우리 사회는 어느덧 재판의 신뢰와 권위 확보를 위하여 법치주의를 새로운 신화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 아닌지, 그 신화에 기대어 그 옛날 신탁처럼 재판에 대한 신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러던 중 사법농단이 발생했다. 합리적 근거 없이 판사라는 이유만으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합당한 정의를 구현하는 판단만을 할 것이라는 신뢰를 받아오던 판사들도 사실은 평범하고 흔들리는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판사들은 신관의 위치에서 인간의 위치로 내려오게 되었다.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의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예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온 나는 한 사람의 판사로서 그리고 한 명의 시민으로서 지면을 통해 고민을 공유하고 답을 함께 찾아가보려 한다. 이 여정에 즐겁게 동행해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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