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난민지원네트워크) 지금 제주도에 예멘 국적 난민 500여명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 주는 낯섦이 한국 사회에 어떤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위상과 책임에 맞게 난민제도를 운영해온 한국에서 그동안 난민들은 이미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수가 현저히 적기도 했지만, 난민들은 소수자들에게 흔히 강요되듯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죽음으로의 송환을 막으려는 활동가들과 불완전한 제도를 운영하는 정부의 줄다리기 속에서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았다. 미투 운동으로 강요된 침묵을 깬 여성의 목소리, 이동권 투쟁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이 된 장애인의 존재와 같다. 이미 살고 있던 난민들의 존재가 예상치 못한 관심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성급한 응답들이 격하게 쏟아졌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는 난민법을 폐지하고 예멘인들의 난민신청을 거부하라는 조직적인 청원이 올라왔고, 부정확하고 날선 댓글들이 난무한다. 가짜 난민 아니냐고, 돈 벌러 온 노동자 아니냐고, 생경한 무슬림이라고, 잠재적 범죄자 아니냐고, 자국민 보호나 제대로 하라고 정부에 외치는 경우도 있다. 그간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고 연대해온 많은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 제주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프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죽음의 공포를 탈출한 보호되어야 하는 난민이다. 예멘의 전쟁은 지정학적 요충지가 아닌 까닭에 국제사회의 관심에서도 비켜난 ‘잊힌 전쟁’이다. 예멘은 가깝게는 2015년 이후 계속된 후티 반군과 아랍 연합군의 전쟁, 멀게는 분단과 통일에 연계된 전쟁 속에서 1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숱한 여성과 어린이가 숨지고, 기아와 징집과 전투가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반세기 전 한국전쟁이 드리운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향을 떠나 타지로, 해외로 피신한 난민이었던 우리들과 같다. 현재 유엔난민기구의 모태가 된 유엔한국재건단(UNKRA)은 바로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던 게 아닌가. 그간 쉽게 성명을 낸 적 없는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도 6월18일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한 예멘으로 그 어떤 예멘인도 강제송환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엔난민기구의 단호한 입장”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백인/남성’을 정점으로 위계화된 인종주의에 터잡은 한국 사회 일부의 차별과, 종교에 대한 선입견은 결국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다시 전쟁터로 보내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정부 당국의 불완전한 대책과 결합하여 현실로 존재하는 난민들에게 아프게 꽂히고 있다. 그럼 한국 사회는 이 낯섦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국적을 기반으로 정초된 근대적 인권체계하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할 국가로부터 오히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쫓겨난 이들이다. 평화로운 삶을 찾아 피신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주는 의미는 지금 유례없이 평화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에게 더욱 남다르지 않은가? ‘윗집에서 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상습구타를 당해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바로 그 아이가 뛰쳐나와 살려달라며 아랫집으로 뛰어왔다.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술 취한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집주인이 문을 닫으며 말한다. “미안하지만 옆집으로 도망갈래?”’ 이 이야기에서 낯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반세기 전 국제전으로 많은 국민이 난민으로 떠돈 역사를 가진 한국인, 이제 70년 분단체제의 극복 과정을 목도하며 지구촌 평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한국 사회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칼럼 |
[시론] 왜 날선 목소리는 반복해 아픈 사람을 향하는가 / 이일 |
변호사(공익법센터 어필·난민지원네트워크) 지금 제주도에 예멘 국적 난민 500여명이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 주는 낯섦이 한국 사회에 어떤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위상과 책임에 맞게 난민제도를 운영해온 한국에서 그동안 난민들은 이미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 수가 현저히 적기도 했지만, 난민들은 소수자들에게 흔히 강요되듯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했다. 죽음으로의 송환을 막으려는 활동가들과 불완전한 제도를 운영하는 정부의 줄다리기 속에서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았다. 미투 운동으로 강요된 침묵을 깬 여성의 목소리, 이동권 투쟁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이 된 장애인의 존재와 같다. 이미 살고 있던 난민들의 존재가 예상치 못한 관심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자 성급한 응답들이 격하게 쏟아졌다. 청와대 청원 사이트에는 난민법을 폐지하고 예멘인들의 난민신청을 거부하라는 조직적인 청원이 올라왔고, 부정확하고 날선 댓글들이 난무한다. 가짜 난민 아니냐고, 돈 벌러 온 노동자 아니냐고, 생경한 무슬림이라고, 잠재적 범죄자 아니냐고, 자국민 보호나 제대로 하라고 정부에 외치는 경우도 있다. 그간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고 연대해온 많은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 제주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여서 아프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죽음의 공포를 탈출한 보호되어야 하는 난민이다. 예멘의 전쟁은 지정학적 요충지가 아닌 까닭에 국제사회의 관심에서도 비켜난 ‘잊힌 전쟁’이다. 예멘은 가깝게는 2015년 이후 계속된 후티 반군과 아랍 연합군의 전쟁, 멀게는 분단과 통일에 연계된 전쟁 속에서 1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숱한 여성과 어린이가 숨지고, 기아와 징집과 전투가 끊이지 않는다. 이들은 반세기 전 한국전쟁이 드리운 죽음의 공포 속에서 고향을 떠나 타지로, 해외로 피신한 난민이었던 우리들과 같다. 현재 유엔난민기구의 모태가 된 유엔한국재건단(UNKRA)은 바로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난민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던 게 아닌가. 그간 쉽게 성명을 낸 적 없는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도 6월18일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에 처한 예멘으로 그 어떤 예멘인도 강제송환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유엔난민기구의 단호한 입장”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백인/남성’을 정점으로 위계화된 인종주의에 터잡은 한국 사회 일부의 차별과, 종교에 대한 선입견은 결국 고통받는 피해자들을 다시 전쟁터로 보내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정부 당국의 불완전한 대책과 결합하여 현실로 존재하는 난민들에게 아프게 꽂히고 있다. 그럼 한국 사회는 이 낯섦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국적을 기반으로 정초된 근대적 인권체계하에서 자신을 보호해야 할 국가로부터 오히려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쫓겨난 이들이다. 평화로운 삶을 찾아 피신한 존재들이다. 이들이 주는 의미는 지금 유례없이 평화를 갈구하는 한국인들에게 더욱 남다르지 않은가? ‘윗집에서 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상습구타를 당해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오늘 바로 그 아이가 뛰쳐나와 살려달라며 아랫집으로 뛰어왔다. 뒤에서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술 취한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집주인이 문을 닫으며 말한다. “미안하지만 옆집으로 도망갈래?”’ 이 이야기에서 낯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반세기 전 국제전으로 많은 국민이 난민으로 떠돈 역사를 가진 한국인, 이제 70년 분단체제의 극복 과정을 목도하며 지구촌 평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한국 사회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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