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20 11:29
수정 : 2018.06.2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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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째 예멘인 10여명이 머물고 있는 제주도민 하씨의 연습실. 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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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곳 내어주고 한국어·문화 교실 열려
식료품·생필품 기부 등 잇단 자발적 도움
“제주가 겪은 4·3 고통과 난민 처지 비슷
가까이서 본 예멘인, 예의 몸에 밴 사람들
연민도 혐오도 아닌 공존해야 할 대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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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째 예멘인 10여명이 머물고 있는 제주도민 하씨의 연습실. 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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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온 500여명의 예멘인들은 한국 사회에 던져진 커다란 질문이자, 지금껏 풀어보지 못한 어려운 ‘숙제’가 됐다. 이들이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난민을 추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극단적인 ‘혐오 표현’마저 들끓고 있다. 반면 예멘인들을 조용히 품어 쉴 공간을 내주거나 문화의 다리를 놓는 등 ‘공존’의 싹을 틔우는 시민들도 있다. 이들은 익명의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혐오’의 근거를 낮은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국악을 전공한 하정연(가명·38)씨는 제주시 출입국관리소 근처에 있는 자신의 연습실을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예멘인들에게 일주일 넘게 내주고 있다. 19일 <한겨레>가 60평 남짓한 하씨 연습실을 찾았을 때도 예멘인 10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이불을 깔고 누워 있었다. 벽 한쪽에는 하씨의 장구가 빼곡히 정리돼 있었고, 곳곳에 식빵·우유·휴지와 같은 식료품과 생필품이 상자째 쌓여 있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지원한 게 아니었다. 오로지 하씨와 그의 지인들의 마음만으로 푸근한 ‘쉼터’를 만들었다.
하씨가 자신의 공간을 예멘인들에게 내주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제주도에 온 예멘 난민들이 잠잘 곳이 없다는 글을 봤어요. 저는 예멘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오갈 데가 없다는 이야기에 ‘우리 연습실이 비어 있는데’라고 떠올리게 된 거죠.”
하씨가 페이스북 글을 본 날에 ‘하필이면’ 비가 많이 왔다. “비가 와서 예멘인들이 더 힘들 것 같더라고요. 난민을 돕는 분들께 연락해서 마침 제 연습실이 비어 있는데 괜찮겠냐고 물었죠.” ‘지붕만 있으면 된다’는 답을 듣고 하씨는 그날 바로 예멘인 10여명을 연습실로 들였다. 집에 있던 이불만 가져다 임시 쉼터를 만들었다. “비만 피할 수 있게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거예요.” 하씨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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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의 지인들이 예멘인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을 열었다. 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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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음알음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지인들에게 예멘 난민들이 연습실에서 지내는데 이불, 식량, 생필품이 부족하다고 도움을 청했어요. 주변에 예술을 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확실히 감성적인 접근에 약하더라고요.(웃음)” 하씨는 주변 지인들과 난민을 돕는 성당 교인들이 하루에도 10여명씩 찾아와 생필품과 식료품을 두고 간다고 전했다. 저녁때면 지인들과 함께 예멘인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도 연다. 지난 14일 제주출입국·외국인청이 마련한 취업설명회를 앞두고는 미용사 일을 하는 지인이 찾아왔다. ‘이왕이면 깔끔한 모습이 유리하지 않을까’ 싶어 예멘 난민 신청자들의 머리를 깎아줬다. 이날 기자가 하씨의 연습실에서 인터뷰하는 중간에도 그의 지인 둘이 제주 동문시장 외국인 상점에서 안남미 10㎏과 할랄 마크가 찍힌 커피와 식빵을 사 들고 하씨의 연습실에 왔다. 무슬림이 많은 예멘인의 종교적 특수성과 쫀득한 자포니카쌀에 익숙지 않은 식성까지 고려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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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의 지인들이 기부해준 식료품들.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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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 전공자로 제주 ‘할망’(‘할머니’의 제주도 방언)을 인터뷰해온 정수연(가명·38)씨도 매일 연습실을 찾는 지인 중 하나이다. 대학 시절 인도네시아 지역을 연구해 이슬람 문화에 익숙한 정씨는 하씨에게 이슬람 문화를, 예멘인들에게는 한국 문화를 전하는 ‘가교’ 구실을 한다. 정씨는 “예멘 분들에게 우리나라의 문화를 알려줘요. 예컨대 ‘예뻐요’ 같은 말은 칭찬이라도 실례가 될 수 있는 걸 알려주는 식으로요”라고 말했다.
정씨는 예멘인들을 대할 때 ‘제주 할망’을 떠올린다. “할망들이라면 예멘인에게 어떻게 대했을까 고민해 봐요. 그분들 말씀이 ‘일제 말기 엄혹한 시대에도 어린 일본 병사가 배를 곯고 있으면 몰래 삶은 감자를 줬다’고 하셨거든요. 인간 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그분들이 경험한 4·3의 참혹한 경험도 내전에 내몰린 난민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고요.”
예멘에서 온 난민 신청자들과 일상을 나누고 있는 이들은 예멘인들에게 쏟아지는 혐오 표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의 욕구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이슬람 문화예요. 이슬람 문화는 실은 배가 고프다고 먼저 도움을 청하는 것조차 부끄럽게 여기는 문화거든요. 그런 사람들이 자존심을 꺾고 ‘지금 정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상황인 거죠.” 정씨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하씨도 “가까이서 본 예멘인들은 정말 정중했어요. 밥을 먹을 때도 제가 식사를 하기 전까지는 수저도 들지 않더라고요”라며 맞장구를 쳤다.
연습실에 있다 취업을 위해 떠난 사람이 벌써 10여명이 됐다. 배를 타러 떠나기 전 하씨가 작별인사를 하자 “누나 고마워요”라고 말하며 몸을 덜덜 떨던 예멘인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그나마 기댈 수 있었던 온정을 뒤로하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두려움일 것으로 하씨는 짐작했다. “‘너희의 용기를 존중한다. 분명히 좋은 날이 올 거다. 나도 기도하겠다’고 말해줬어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인 것 같아요.”
하씨는 당분간 연습실을 예멘인들에게 내줄 계획이다. “빈 공간이 있어 빌려주는 거지 계획적으로 진행된 건 아니에요.” 자신이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라는 하씨는 하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제주에서 머물며 우리에 대해 배우는 것만큼 우리도 그들과 생활하며 그들에 대해 배워야 할 것 같아요. 언론에서 단순히 예멘 난민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혹은 혐오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주/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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