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국가·제도·사회에 만연한 무책임 구조는 혐오발화의 원천이고, 양자는 서로를 확대 재생산한다. 발화 원천, 주체, 책임 문제로 오래 논쟁을 해온 혐오발화 연구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하더라’ 식의 인용도 책임이 따르고, 그런 인용이 나올 수 있는 담론 무더기를 만든 사회 구조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떤 책임일까? 한마디로 학살에 대한 책임이다. 물론 모든 혐오발화가 즉각적으로 학살 효과를 발휘하진 않는다. 그러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증오 선동에 의한 혐오발화는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학살 효과를 발휘한다. 어떻게 학살 효과가 발생하나? 바로 적을 생산하는 폭력과 쾌락을 통해서다. 파시즘은 근대의 정체성 정치의 배제 원리를 적을 생산하는 폭력으로 전환했고 증오 정치란 바로 이 뜻이다. 물론 정체성 정치와 파시즘은 단순하게 등치될 수도 없고 이 전환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파시즘 연구의 긴 역사가 바쳐졌다. 단순한 일반화와 도식적 선언은 그만두자. ‘예멘 난민 거부’ 국민청원의 집중력과 속도전은 혐오발화와 가짜뉴스의 총력전으로 가능했지만, 한편으로는 법무부가 예멘 난민을 제주도에 ‘가두는’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가짜뉴스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살포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혐오발화가 퍼지는 방식은 성소수자와 이민과 난민에 대한 증오 선동,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차별 선동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번 제주 예멘 난민 차별 선동은 2014년의 ‘이자스민법’에 대한 차별 선동과 유사하다. 이 총력전에 일베와 자칭 진보 남성 커뮤니티가 대거 동참했다. ‘정상 가족 보호’를 내건 보수 여성 커뮤니티도 동참했고 이들은 이번 난민 증오 선동에서도 등장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계정이나 커뮤니티에서 난민 차별을 선동하는 혐오발화 혹은 가짜뉴스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인용 책임’이 막중하다. 같은 시기 일본 법무성 인권옹호국은 지진 이후 인터넷 가짜뉴스가 혐오발화를 부추기는 것에 대해 경계하라고 공지하였다. 한국에는 혐오발화에 대한 법적 조치도 차별금지법도 없다. 이런 복합적 요인을 단순화해서 ‘인터넷 페미니스트’를 주동자로 지목하거나 ‘극우 페미니즘’의 등장을 운운하는 선정적 논의도 문제다. 여성의 공포를 앞세우는 주장은 이런 일방적 매도에 맞서는 ‘악순환’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매도와 악순환은 혐오발화에 대응하는 데 효과도 없고 ‘딱지 붙이기’만 강화한다. 반면 여성의 공포를 증오 선동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맞세우는 논리는 벗어나야 한다. 여성이 성폭력과 ‘안전’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공포가 적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공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심에서라도 누군가를 적대하여 추방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낯선 누군가에 대한 공포는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공포가 폭력과 살인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하는 애씀이 바로 인간이 윤리적 존재가 되는 실천이다. 성범죄와 폭력에 대한 여성의 공포는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극복할 수 없고 누구도 벗어나기 어렵게 원초적이다. 그러나 그 공포가 다른 존재를 절멸하고 부정하고 추방하는, 적을 생산하는 증오 정치의 이유나 합리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여성의 공포는 이 사회를 반드시 바꾸어야만 하는 이유이자 근거이지, 증오 정치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은 사회를 바꾸는 이론이자 실천이지 적을 생산하는 증오 정치를 합리화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다.
칼럼 |
[세상 읽기] 공포와 적대의 거리, 적을 생산하는 폭력 / 권명아 |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국가·제도·사회에 만연한 무책임 구조는 혐오발화의 원천이고, 양자는 서로를 확대 재생산한다. 발화 원천, 주체, 책임 문제로 오래 논쟁을 해온 혐오발화 연구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하더라’ 식의 인용도 책임이 따르고, 그런 인용이 나올 수 있는 담론 무더기를 만든 사회 구조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떤 책임일까? 한마디로 학살에 대한 책임이다. 물론 모든 혐오발화가 즉각적으로 학살 효과를 발휘하진 않는다. 그러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증오 선동에 의한 혐오발화는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학살 효과를 발휘한다. 어떻게 학살 효과가 발생하나? 바로 적을 생산하는 폭력과 쾌락을 통해서다. 파시즘은 근대의 정체성 정치의 배제 원리를 적을 생산하는 폭력으로 전환했고 증오 정치란 바로 이 뜻이다. 물론 정체성 정치와 파시즘은 단순하게 등치될 수도 없고 이 전환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파시즘 연구의 긴 역사가 바쳐졌다. 단순한 일반화와 도식적 선언은 그만두자. ‘예멘 난민 거부’ 국민청원의 집중력과 속도전은 혐오발화와 가짜뉴스의 총력전으로 가능했지만, 한편으로는 법무부가 예멘 난민을 제주도에 ‘가두는’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가짜뉴스가 ‘누군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살포되고 인터넷 커뮤니티에 혐오발화가 퍼지는 방식은 성소수자와 이민과 난민에 대한 증오 선동,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차별 선동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번 제주 예멘 난민 차별 선동은 2014년의 ‘이자스민법’에 대한 차별 선동과 유사하다. 이 총력전에 일베와 자칭 진보 남성 커뮤니티가 대거 동참했다. ‘정상 가족 보호’를 내건 보수 여성 커뮤니티도 동참했고 이들은 이번 난민 증오 선동에서도 등장한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계정이나 커뮤니티에서 난민 차별을 선동하는 혐오발화 혹은 가짜뉴스를 인용한 것에 대해서는 ‘인용 책임’이 막중하다. 같은 시기 일본 법무성 인권옹호국은 지진 이후 인터넷 가짜뉴스가 혐오발화를 부추기는 것에 대해 경계하라고 공지하였다. 한국에는 혐오발화에 대한 법적 조치도 차별금지법도 없다. 이런 복합적 요인을 단순화해서 ‘인터넷 페미니스트’를 주동자로 지목하거나 ‘극우 페미니즘’의 등장을 운운하는 선정적 논의도 문제다. 여성의 공포를 앞세우는 주장은 이런 일방적 매도에 맞서는 ‘악순환’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매도와 악순환은 혐오발화에 대응하는 데 효과도 없고 ‘딱지 붙이기’만 강화한다. 반면 여성의 공포를 증오 선동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맞세우는 논리는 벗어나야 한다. 여성이 성폭력과 ‘안전’에 대한 헤아릴 수 없는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공포가 적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공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심에서라도 누군가를 적대하여 추방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의 윤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낯선 누군가에 대한 공포는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공포가 폭력과 살인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하는 애씀이 바로 인간이 윤리적 존재가 되는 실천이다. 성범죄와 폭력에 대한 여성의 공포는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극복할 수 없고 누구도 벗어나기 어렵게 원초적이다. 그러나 그 공포가 다른 존재를 절멸하고 부정하고 추방하는, 적을 생산하는 증오 정치의 이유나 합리화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여성의 공포는 이 사회를 반드시 바꾸어야만 하는 이유이자 근거이지, 증오 정치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페미니즘은 사회를 바꾸는 이론이자 실천이지 적을 생산하는 증오 정치를 합리화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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