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10.19 16:12 수정 : 2018.10.19 18:33

법무부의 출국명령을 받은 예멘인 살라(38)가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발목 수술을 받았다.

[한겨레21]
법무부, 예멘인 339명 인도적 체류 지위… 34명 불인정
출국명령 뒤 기한 유예 땐 ‘유령’처럼 한국 떠돌아

법무부의 출국명령을 받은 예멘인 살라(38)가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발목 수술을 받았다.

“출국기한유예.”

지난 10월12일 <한겨레21>과 만난 예멘인 이삼(34)의 여권에는 출국기한유예 딱지가 빼곡하게 붙었다.

이삼이 출국기한유예 딱지를 처음 받은 건 지난 2월이었다.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하기 위해 인천출입국·외국인청(출입국청)을 찾았을 때다. 그는 출입국청 직원이 내민 서류에는 한글과 영어만 있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출입국청 직원은 그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서명하라고만 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데 왜 서명을 해야 하냐”고 물었지만 소용없었다. 직원은 “서명하지 않으면 체류 기간을 연장해주지 않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삼은 어쩔 수 없이 무슨 서류인지도 모르고 서명했다. 서류를 받은 출입국청은 그의 외국인등록증을 가져가고 대신 여권에 딱지를 붙여줬다.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출입국청 담당자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났다. 일할 수도, 병원에 갈 수도 없고, 시한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래 떠나자’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한국을 나가서 갈 곳이 없다.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당장 가겠다. 너무 힘들다.” 지친 표정의 이삼이 힘없이 말했다.

예멘 사업가 이삼, 4년째 피 말리는 한국 유랑

이삼은 유자차로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2009년 아시아 곳곳을 떠돌며 무역업을 하던 중 싱가포르에서 우연히 유자차를 마시는 순간 속으로 ‘이거다!’ 소리를 질렀다. 많은 사람이 유자청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차로 마시기도 하고, 빵을 찍어 먹는 걸 보고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입해서 팔겠다고 결심했다. 한국의 한 식료품 회사 누리집에서 값을 확인하고 주문했다. 사우디에서 유자차는 인기가 좋았다. 금세 다 팔렸고 이삼은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이삼은 유자차의 나라, 한국에 가보고 싶었다. 당시 한국과 예멘은 사이가 좋았다. 내전이 격화되기 전인 2011년에는 별도 비자 없이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그는 인천항만 근처에 중고 자동차 수출단지를 보고 유자차가 아닌 중고차를 수입해서 팔겠다고 마음먹었다. 2012년부터 동생 압둘라와 함께 한국과 예멘, 사우디를 오가며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고국 예멘의 상황이 점점 불안정해졌다. 내전이 확산되고 혼란이 가중되면서 이삼의 사업도 위협을 받았다. 2014년 9월 수도 사나를 점령한 후티 반군은 10월에는 예멘 동남부의 주요 항구도시 호데이다를 점령했다. 이삼은 사업을 접어야 했다. 예멘에 보내는 자동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항구를 점령한 후티 반군에 뺏길 가능성이 컸다. 언제든 전쟁터에 끌려갈 수 있는 예멘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삼-압둘라 형제는 2014년 말 한국에서 난민 신청을 했다. 하지만 2015년 그들에게 돌아온 건 ‘난민 불인정’ 결정이었다.

난민 불인정을 받은 예멘인 이삼(34)의 여권에 붙은 출국기한유예 딱지. 박승화 기자

난민신청 사유 같은데 동생은 인도적 체류

난민 불인정 결정은 이삼에게 난민 신청 절차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난민 불인정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난민 불인정에 대한 행정소송을 하는 동안 2년이 훌쩍 흘렀다. 이삼은 난민 소송을 하는 동안 일도 할 수 없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앓았던 척추 질환이 재발하면서 건강까지 나빠졌다.

“2016년 (난민) 재신청을 했다. 이때부터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민 심사와 관련한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어 불안했고, 전에 일해서 모아놓은 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불안한 삶에 지친 이삼은 다른 나라로 가는 방법을 찾지만 여전히 지구에서 예멘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없다.

“한국으로 오지 마! 다른 나라로 갈 방법을 찾아봐.” 이삼은 예멘을 떠나 말레이시아에 있던 막내 남동생 헤탄이 올해 초 한국으로 오겠다고 했을 때 필사적으로 막았다. 하지만 헤탄은 형의 조언을 듣지 않고,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제주도에 있는 예멘인 458명은 앞서 한국에서 난민 신청한 예멘인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고 있다. 인도적 체류 지위도 받지 못하면 나처럼 된다는 사실도 다 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한국으로 온 것은 그들이 갈 수 있는 마지막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삼이 말했다.

다행히 막냇동생 헤탄은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았다. 난민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막내는 자기와 달리 예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한국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인도적 체류 지위를 받은 예멘인에게 출국 명령을 내린 경우는 없다. “헤탄과 나는 형제이고 난민 지원 사유도 같은데, 왜 나는 불인정이고 동생은 인도적 체류 지위를 주는가? 둘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삼은 궁금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외국인등록증을 돌려주고, 제발 예멘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머물 수 있게만 해달라. 예멘 내전이 끝나면 나는 한국을 떠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겠다.”

“새장에 가둬놓고 먹이도 안 준다”

살라(38)가 처음 출국명령서를 받은 건 2016년 11월2일이다. 난민 심사 재신청을 위해 출입국청을 찾았는데 출입국청은 재신청은 받아들이지 않고, 살라의 외국인등록증을 가져가 한 달 뒤까지 한국을 떠나라는 출국명령서를 내줬다. “처음에는 한 달, 그다음에는 출국 기한을 석 달 단위로 정해주더니 최근에는 두 달 단위로 기간을 줄였다. 두세 달에 한 번씩 출입국청에 가서 출국 기한을 연장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렇게 2년을 살았다.”

그는 2018년 8월29일 서울 출입국청에서 새 출국명령서를 받았다. 살라가 받아든 출국명령서는 2018년 11월2일까지 그가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취업 불가’라고 선명하게 찍힌 푸른색 도장은 그의 목을 죄는 굴레다. “아직 (예멘에) 안 갔어?”라고 출입국청 직원이 물으면 살라는 “예멘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도 없고, 갈 방법이 없다. 어떻게 가라는 거냐”라고 되물었지만, 출입국청 직원은 “그럼 다른 나라로 가라”고 했다. 살라는 “사는 곳이 경북 구미여서 서울까지 오기가 힘들다. 유예기간을 3개월로 해주면 안 되겠나” 부탁했지만 출입국청 직원은 단호했다.

“‘제발 취업 불가 도장만이라도 지워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출입국청 직원은 ‘집에 가, 다른 나라로 가’라는 말만 반복한다.” 비통한 표정으로 말하는 살라는 한국어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몰라!” “가!”라는 단어만큼은 완벽하게 흉내 냈다.

법무부가 살라에게 8월29일 발급한 출국명령서. 취업 불가 도장이 찍혀 있다. 박승화 기자

난민 불인정 뒤 “모든 문이 닫혔다”

난민 불인정자 지위로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살라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부산, 평택, 발안 등 수시로 거처를 옮겼다. 자동차부품, 화장품 등 여러 공장을 전전했지만 출입국청의 단속을 우려한 공장주들을 그를 석 달 이상 고용하지 않았다. 계속 떠돌아다녔다.

2016년은 살라에게 최악의 해였다. 난민 심사 결과 불인정을 통보받았고, 외국인등록증을 빼앗겼으며, 취업 불가가 찍힌 출국명령서까지 받았다.

“모든 문이 닫혔다.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느낌이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살라는 한숨 쉬며 말했다. 출국명령서를 받아든 살라는 구미로 갔다. 취업 불가 도장을 보고도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우디에서 살다가 걸프전쟁이 터지고 예멘으로 돌아갔던 1990년 뒤로 힘들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최근 2년은 정말 힘들었다. 하루하루 사연 없는 날이 없었다.” 살라는 날마다 오전에 집을 나서서 일자리 소개 사무실을 찾거나 집 근처 공장, 건설 현장을 돌며 할 일을 찾았다. 대부분은 공사일이었고, 사과·마늘 등 농사일이 많았다. 2주에 한 번 정도 일해서 번 돈으로 일하지 않는 날들을 지탱했다.

한민족 최대의 명절을 앞두었던 9월21일 살라는 인생 최대의 고비에 맞닥뜨렸다. 계단에서 넘어졌는데 왼쪽 발목뼈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잠도 잘 수 없었다. 평소에 마시지 않던 소주를 사서 마셔야 고통을 잊고 잘 수 있었다. 술이 깨면 너무 아파서 다시 술을 마셨다.”

병원 쪽은 의료보험이 없어 치료비가 700만원쯤 들 거라고 했다. 방세도 8개월째 밀린 살라에게 돈이 있을 리 없다. “최근 석 달은 정말 힘들었다. 거의 매끼 라면만 먹었다. 이렇게 비참한 삶을 살 거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한국 정부는 나를 새장에 가두고 먹이도 주지 않으며 언제 죽는지 지켜보려는 거 같다.”

살라의 사연을 들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가 살라를 서울 녹색병원으로 불러 수술할 것을 결정했다. 10월3일 수술을 받은 그는 치료를 마치고 퇴원했다. 살라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난민 불인정 판정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출국명령을 받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제주도에서 난민 신청한 사람 중 34명이 난민 불인정 판정을 받았는데, 그들은 나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출국 유예자 느는데… 법무부 “숫자 파악 불가”

제주 출입국청은 10월17일 난민 신청을 한 예멘인 373명의 심사 결과에서 34명에 대해 난민 불인정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삼과 살라와 같은 처지에 놓일 예멘인 34명이 추가된 셈이다. 나머지 339명은 인도적 체류 지위를 인정받았다. “(난민) 불인정자가 90일 이내에 이의 신청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도균 제주출입국청장은 “출국해야 하고, 출국하지 않으면 출국명령을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출국명령을 받고도 한국을 떠나지 못하고, 유령처럼 살아가는 예멘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예멘 난민을 한국에서 쫓아내고, 내전 상황이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 예멘으로 보내는 것은 명백한 난민협약 위반이다.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변호사는 “법무부는 출국명령을 내렸을 뿐 실제로 내보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민협약 위반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출국명령 자체가 난민의 체류 지위를 뺏는 것이기에 강제 송환으로 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출국명령을 강제송환으로 해석하면 이삼과 살라에 대한 출국명령은 난민협약 위반 사유가 된다.

출국명령을 받는 예멘인은 늘어나는데 법무부는 정확한 규모가 어떻게 되는지 파악도 하지 않는다. 법무부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예멘 난민 신청자 중 출국명령이 떨어진 사람 수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파악하려면 난민 개인 자료를 조회해야 한다”고 했다. 법무부는 외국인등록증을 빼앗고, 출국명령을 내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G-1(기타사유)비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매달 발표하는 통계월보에는 이삼과 살라처럼 출국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G-1으로 분류된다. 당국이 출국명령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나가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다. 이렇게 방치된 예멘인들은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는 비참한 일상을 기약 없이 버티고 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