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부문장 겸 에디터 나의 소박한 다짐은 결국 올해 꺾이고 말았다. 111년 만의 더위 앞에 ‘에어컨 없는 삶’이 맥없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껏 집에 에어컨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타고난 게으름이 컸다. 무더위가 신념을 좀먹고, 인내심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매년 7월 말쯤엔 에어컨 주문이 소용없는 짓이 되곤 했다. 설치까지 열흘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쯤이면 아침저녁 찬 바람이 불어올 시기였다. 그때를 제외하면 그다지 쓸모없는 물건이 에어컨이다. 무사히 한여름을 넘기면서 “게으름이 꼭 나쁜 건 아니”라며 자신을 대견해하기도 했다. 물론 동거인 중에 아이나 노인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두 번째는 지구와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어쭙잖은 소신이었다. 에어컨 냉매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다. 또 에너지보존 법칙을 알지 못해도 집 안이나 자동차 에어컨에서 빠져나간 열기가 누군가의 짜증지수를 더 높이리라는 건 안다. 찌는 듯한 버스 중앙차로 정거장이나 질식할 듯한 도심 골목길에 있다 보면, 바깥에 있는 사람이야 어찌 되든 얇은 겉옷을 걸쳐야 할 만큼 차갑게 틀어대는 에어컨에 부아가 치밀곤 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나부터라도 끊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선택한 실천이 에어컨 없는 삶이었다. 입으로만 환경 보호, 에너지 절약을 외치는 이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강박도 있었다. ‘정신 승리’로 버텨내던 내 신념은 수인한도를 넘어선 초열대야에 무너졌다. 한밤중에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는 뇌세포와 근육세포를 모조리 분리시킨 듯 내 몸과 마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갈증이 심해도 바닷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이제 에어컨은 호사품이 아니라 생필품임을, 냉방은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기본권이라는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됐다. ‘에어컨 있는 삶’을 강요한 이번 폭염이 던진 화두는 묵직하다. 북극의 빙하가 녹고 있는 영상은 먼 곳의 일이라며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었지만 폭염이 사람과 가축, 농작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걸 실시간으로 주변에서 지켜보는 건 체감도가 다르다. 기록적 폭염은 우리뿐만 아니라 영국·그리스, 미국·캐나다 그리고 스웨덴과 노르웨이, 일본 등 북반구 비열대 지역을 동시에 덮쳤다. 수천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했고 수백명이 숨졌다. 걷잡을 수 없는 산불에 인간은 속수무책이었다. 기후변화의 영향과 후폭풍이 지금까지의 예측보다 훨씬 빠르고 파멸적일 수 있음을 드러낸 징후들이다. 새삼 지난 100여년 새 지구 평균 최고 기온을 경신한 18년 중 17년이 2001년 이후의 일이고, 단 한 번의 예외 역시 1998년이었다는 통계도 무게감을 더한다. 지구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우리는 제대로 아는 걸까. 인류는 지구온난화의 위험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최근의 이상기후는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점에서 ‘비정상’이지만 예측 가능한 변화의 궤도에 있다는 점에선 ‘정상’이다. 그렇다면 비정상의 정상화 속도를 늦추거나 중단시켜야 한다. 자식 세대에 조금이라도 민폐를 덜 끼치려면 말이다. 이대로라면 그들은 에어컨 아래에서도 더위를 피하지 못한 채 더 서늘한 곳을 찾아 떠도는 ‘기후 난민’이 될 수도 있다. 내 부끄러운 좌절기를 앞세운 이유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이 없으면 결코 이를 막을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젠 누구나 지구온난화가 20세기에 급팽창한 탄소에너지에서 비롯됐음을 안다. 기후변화가 재난임을 실감케 한 이번 폭염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한 집단적 의지를 모으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miso@hani.co.kr
칼럼 |
[편집국에서] ‘에어컨 없는 삶’의 종말을 고하며 / 이재명 |
디지털부문장 겸 에디터 나의 소박한 다짐은 결국 올해 꺾이고 말았다. 111년 만의 더위 앞에 ‘에어컨 없는 삶’이 맥없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금껏 집에 에어컨을 두지 않았던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타고난 게으름이 컸다. 무더위가 신념을 좀먹고, 인내심마저 바닥을 드러내는 매년 7월 말쯤엔 에어컨 주문이 소용없는 짓이 되곤 했다. 설치까지 열흘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쯤이면 아침저녁 찬 바람이 불어올 시기였다. 그때를 제외하면 그다지 쓸모없는 물건이 에어컨이다. 무사히 한여름을 넘기면서 “게으름이 꼭 나쁜 건 아니”라며 자신을 대견해하기도 했다. 물론 동거인 중에 아이나 노인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다. 두 번째는 지구와 주변에 민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어쭙잖은 소신이었다. 에어컨 냉매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이다. 또 에너지보존 법칙을 알지 못해도 집 안이나 자동차 에어컨에서 빠져나간 열기가 누군가의 짜증지수를 더 높이리라는 건 안다. 찌는 듯한 버스 중앙차로 정거장이나 질식할 듯한 도심 골목길에 있다 보면, 바깥에 있는 사람이야 어찌 되든 얇은 겉옷을 걸쳐야 할 만큼 차갑게 틀어대는 에어컨에 부아가 치밀곤 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나부터라도 끊어야 한다는 다짐으로 선택한 실천이 에어컨 없는 삶이었다. 입으로만 환경 보호, 에너지 절약을 외치는 이들과 다르게 살고 싶다는 강박도 있었다. ‘정신 승리’로 버텨내던 내 신념은 수인한도를 넘어선 초열대야에 무너졌다. 한밤중에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는 뇌세포와 근육세포를 모조리 분리시킨 듯 내 몸과 마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갈증이 심해도 바닷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다. 이제 에어컨은 호사품이 아니라 생필품임을, 냉방은 선택적 복지가 아니라 기본권이라는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됐다. ‘에어컨 있는 삶’을 강요한 이번 폭염이 던진 화두는 묵직하다. 북극의 빙하가 녹고 있는 영상은 먼 곳의 일이라며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었지만 폭염이 사람과 가축, 농작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걸 실시간으로 주변에서 지켜보는 건 체감도가 다르다. 기록적 폭염은 우리뿐만 아니라 영국·그리스, 미국·캐나다 그리고 스웨덴과 노르웨이, 일본 등 북반구 비열대 지역을 동시에 덮쳤다. 수천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했고 수백명이 숨졌다. 걷잡을 수 없는 산불에 인간은 속수무책이었다. 기후변화의 영향과 후폭풍이 지금까지의 예측보다 훨씬 빠르고 파멸적일 수 있음을 드러낸 징후들이다. 새삼 지난 100여년 새 지구 평균 최고 기온을 경신한 18년 중 17년이 2001년 이후의 일이고, 단 한 번의 예외 역시 1998년이었다는 통계도 무게감을 더한다. 지구에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우리는 제대로 아는 걸까. 인류는 지구온난화의 위험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게 아닐까. 최근의 이상기후는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점에서 ‘비정상’이지만 예측 가능한 변화의 궤도에 있다는 점에선 ‘정상’이다. 그렇다면 비정상의 정상화 속도를 늦추거나 중단시켜야 한다. 자식 세대에 조금이라도 민폐를 덜 끼치려면 말이다. 이대로라면 그들은 에어컨 아래에서도 더위를 피하지 못한 채 더 서늘한 곳을 찾아 떠도는 ‘기후 난민’이 될 수도 있다. 내 부끄러운 좌절기를 앞세운 이유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이 없으면 결코 이를 막을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젠 누구나 지구온난화가 20세기에 급팽창한 탄소에너지에서 비롯됐음을 안다. 기후변화가 재난임을 실감케 한 이번 폭염이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한 집단적 의지를 모으는 계기가 된다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 것이다.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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