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17 06:38
수정 : 2019.04.17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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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공동행동)이 지난해 9월 29일 낮 12시 서울 중구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제269조’의 폐지를 요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200여명의 여성이 하얀 손팻말을 머리 위로 들어 ‘형법 제269조’를 상징하는 숫자 ‘269’를 만든 뒤 붉은 천으로 덮어 해당 법 조항 폐지의 뜻을 표현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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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낙태약 판결문 20건 보니
출처 불분명, 부작용도 검증 안된 약들
수십만원 고가에 사고, 효과 없어 ‘발 동동’
“낙태죄 헌법불합치…유산유도약 허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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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공동행동)이 지난해 9월 29일 낮 12시 서울 중구 청계천 한빛광장에서 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제269조’의 폐지를 요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200여명의 여성이 하얀 손팻말을 머리 위로 들어 ‘형법 제269조’를 상징하는 숫자 ‘269’를 만든 뒤 붉은 천으로 덮어 해당 법 조항 폐지의 뜻을 표현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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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에서 유통되는 낙태약 팝니다.”
2011년 임신 5개월이던 ㄱ씨는 전자우편을 통해 중국에 체류하던 판매자에게 유산유도약을 샀다. 미국의 유명 제조업체에서 만든 약이라고 했다. 노란 약과 흰 약 여러 알로 된 유산유도약 한 세트는 25만원. 그러나 임신중지(낙태)가 되지 않았다. ㄱ씨는 판매자에게 “약을 복용했는데 낙태가 되지 않았다”고 전자우편을 보냈다. “중국으로 오면 임신중절 수술을 돕겠다.” ㄱ씨는 결국 판매자의 말을 믿고 200만원을 내고 국경을 넘어 수술을 감행했다.
<한겨레>가 16일 ‘미프진’ 등 유산유도약 복용과 관련된 법원 판결문 20건을 분석한 결과, 유산유도약을 유통·판매하는 이들이 여성의 절박함을 악용해 효과가 불분명한 약으로 부작용에 시달리게 하거나, 심지어 범죄에 끌어들인 사례가 많았다.
판결문을 보면,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은 중국산 약이 “온라인 공식판매처” “공식 홈페이지” 등의 문구를 걸고 정품인 양 판매된 사례가 다수였다. 판매자들은 누리집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여성들과 접촉했고, 유산유도약은 속칭 ‘따이공’(배나 비행기를 타고 물건을 옮겨주는 사람)을 통해 인천항·인천공항으로 운반되거나 국제우편으로 전달됐다. 범행은 ‘상담→주문→ 배송’으로 세분돼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국내에서 유산유도약 구입은 불법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 통계상 유산유도약 불법판매 사이트 단속 건수는 2015년 12건, 2016년 193건, 2017년 1144건, 2018년 2197건으로 늘고 있다.
약 구입 과정에서 범죄에 연루되거나 사기에 노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ㄴ씨는 2013년 인터넷을 통해 유산유도약을 구해 복용했지만 임신중지에 실패했다. 판매자는 “임신중절수술비를 지급해주겠다. 대신 국제택배로 보낸 유산유도약의 국내 배송을 도와줘야 한다”고 했고, ㄴ씨는 유산유도약을 다른 임신 여성들에게 배송하는 일을 했다. ㄴ씨는 결국 판매업자와 함께 적발돼 재판에 넘겨졌다. ㄷ씨는 유산유도약을 사려다 종합비타민 두 알을 18만원에 사는 사기를 당했으나, 이후에도 약값과 항공비, 세관뇌물비 등을 명목으로 수차례 돈을 뜯겼다.
노새 한국여성민우회 활동가는 “현재 불법 유통되는 약물이 정품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검증된 약을 의료진의 지도 아래 복용해야 하지만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1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단을 한 만큼 유산유도약 등의 도입 논의가 시급하다는 얘기다. 이유림 ‘성과 재생산 포럼’ 기획위원은 “유산유도약이 불법화된 상황에서 여성 건강이 볼모로 잡혀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하도록 하루빨리 관련법을 정비해 유산유도약을 도입해야 한다”고 짚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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