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17 08:06
수정 : 2019.07.17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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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일본대사관터 앞에서 열린 제1395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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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일본대사관터 앞에서 열린 제1395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참가자들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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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복에서 가장 마음 아픈 건 아베의 극우적 행태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여론입니다. 여론조사에서 일본인 56%가 ‘경제 보복을 잘한 것’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는 개인적으론 너무도 친철한 내 일본의 친구들도 섞여 있을 것입니다. ‘오래전 일을 언제까지 계속 물고 늘어질 것이냐’는 힐난이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과거에 묶여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단 한번도 제대로 사죄하지 않은 데에서 기회가 되면 언제든 다시 칼을 휘두르겠다는 속마음이 보여서 그런 겁니다. 역사는 현재이자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선 ‘힘센 놈이 장땡’이라는 사무라이를 찬양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에 도륙과 수탈을 당한 피해자로선 언제든 다시 돌아온 가해자가 휘두른 칼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현존합니다. 일본의 대성인 니치렌은 ‘하루의 목숨은 전 우주의 재물보다 낫다’고 했지요. 우리의 목숨도 니치렌이 제외한 목숨일 리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보복 조처보다 더 놀란 건 미국발 뉴스입니다. ‘미국인 33%가 10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해도 미국이 북한을 핵무기로 선제공격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소식입니다.
2001년 9월11일 인도를 순례 중일 때입니다. 유럽의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든 곳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던 수십명이 갑자기 환호성을 지르며 옥상으로 올라가더니 폭죽을 터트렸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텔레비전을 보니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겼으니 자기들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했습니다. 이날 테러로 2996명이 사망하고 6천여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아무리 히피적 성향의 젊은이들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마치 승전가를 부르는 듯한 모습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죽는 사람이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목숨이 귀하면 그의 목숨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지성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이 재판에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인식조차 못 하고 있음을 보면서 “악의 원인을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나만이 아닌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와 세상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인식입니다. 누구나 다 고통을 싫어하고,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류 성인들의 핵심 가르침은 ‘내가 원치 않은 일을 타인에게 하지 마라’는 데로 이어집니다. 교육도 그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도 그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이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했지요.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했지요. 그런데 미국인에겐 미국이 척도고 일본인에겐 일본이 척도라면, 즉 강자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면 타(他)와 호혜적 관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고한 예수는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도했지요.
제국시대와 나치, 2차 대전의 반성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이끄는 강대국들이 예수의 마지막 기도의 대상이 된다면 한두 사람, 한두 나라의 불행만은 아닙니다. 나는 미국인과 일본인들의 생명을 존중하며,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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