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교수·독문학 2012년 노벨 평화상이 유럽연합에 주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 상의 ‘숨은’ 수상자가 독일과 프랑스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012~2013년은 ‘독일-프랑스의 해’였다. 50년 전인 1962년에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시도가 본격화되었고, 마침내 1963년 1월23일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독불협정, 즉 ‘엘리제 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였다. 2012년에 노벨 평화상이 유럽연합에 수여된 것은 기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유럽의 평화를 가져온 유럽연합을 탄생시켰음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였다. 1870년과 1945년 사이에만 세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1870년 보불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그것이다. 이런 적대의 역사를 가진 두 나라가 ‘화해’함으로써 마침내 ‘전쟁의 대륙’ 유럽이 ‘평화의 대륙’으로 변모할 수 있었고, 나아가 하나의 ‘국가연합’으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제 ‘철천지원수’(Erbfeind)에서 ‘절친’(Erbfreund)이 되었다. 지스카르 데스탱과 헬무트 슈미트, 프랑수아 미테랑과 헬무트 콜 등 양국의 정상들은 정치 노선과 국가 이익을 뛰어넘어 돈독한 우정을 쌓았고, 양국의 도시 간에는 2500건이 넘는 자매결연이 맺어졌으며, 800만명이 넘는 독일과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상호 교류를 했고, 마침내 역사 교과서까지 공동집필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서로를 ‘가장 좋아하는 이웃’으로 꼽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의 역사를 돌아보며 최근 격화되고 있는 한-일 갈등을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도 독일과 프랑스처럼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인가. 1965년 ‘한일협정’에 기초한 현재의 조건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진정한 화해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한일협정의 주도자가 역사적 정당성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1963년 독불협정과 1965년 한일협정의 결정적인 차이는 피해국 수장의 역사적 상징성에 있다. 프랑스의 드골은 레지스탕스의 지도자였고, 한국의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였던 것이다. 브란트가 나치 과거를 청산하고 주변 국가와 화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나치와 맞서 싸운 반나치 투사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일협정은 ‘강요된 화해’의 산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후속 조치로서 한일협정은 냉전시대 미국의 군사전략적 고려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지,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었다. 셋째, 한일협정은 국민의 동의에 기초한 조약이 아니었다. 협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거듭된 것은 한일협정이 국민의 뜻을 거스른 ‘관제 협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일협정은 반성 않는 일본 우익과 성찰 없는 한국 수구의 ‘거짓 화해’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한일협정을 절대적 준거인 양 내세우며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 일본 정부를 옹호하는 인사들은 올바른 역사의식도, 상식적 법감정도 결여한 자들이다. 현재의 한-일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수출규제 때문에 촉발되었지만, 심층적으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누적된 적대적 반감이 폭발한 것이다. 사실 해방 이후 한-일 간에 진정한 화해의 시도는 전무했다. 냉전 시대에 ‘군사동맹’이라는 허울 아래 덮여 있던 적대감이, 냉전에 기생하는 한국의 수구와 일본의 극우의 결탁으로 수면 아래 은폐되어 있던 갈등이 이제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아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하겠다”는 국민들의 정당한 분노가 희망이다. 이것이 과거청산과 동북아평화의 성숙한 정치의식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민주시민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에 중재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최선의 경우라도 냉전적 과거 질서로의 회귀를 낳을 뿐이다. 한-일 갈등의 궁극적 해결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로의 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일본이 동북아 안보협력의 근간을 흔든다”는 식으로 냉전질서의 붕괴를 염려할 일이 아니라, 탈냉전의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모색해야 한다.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려면 한-일 신협정 체결을 통해 새로운 한-일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칼럼 |
[세상읽기] 한국과 일본, 진정한 화해는 가능한가 / 김누리 |
중앙대 교수·독문학 2012년 노벨 평화상이 유럽연합에 주어진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 상의 ‘숨은’ 수상자가 독일과 프랑스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2012~2013년은 ‘독일-프랑스의 해’였다. 50년 전인 1962년에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시도가 본격화되었고, 마침내 1963년 1월23일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독불협정, 즉 ‘엘리제 조약’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는 의미였다. 2012년에 노벨 평화상이 유럽연합에 수여된 것은 기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가 유럽의 평화를 가져온 유럽연합을 탄생시켰음을 국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독일과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였다. 1870년과 1945년 사이에만 세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다. 1870년 보불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그것이다. 이런 적대의 역사를 가진 두 나라가 ‘화해’함으로써 마침내 ‘전쟁의 대륙’ 유럽이 ‘평화의 대륙’으로 변모할 수 있었고, 나아가 하나의 ‘국가연합’으로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이제 ‘철천지원수’(Erbfeind)에서 ‘절친’(Erbfreund)이 되었다. 지스카르 데스탱과 헬무트 슈미트, 프랑수아 미테랑과 헬무트 콜 등 양국의 정상들은 정치 노선과 국가 이익을 뛰어넘어 돈독한 우정을 쌓았고, 양국의 도시 간에는 2500건이 넘는 자매결연이 맺어졌으며, 800만명이 넘는 독일과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상호 교류를 했고, 마침내 역사 교과서까지 공동집필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독일인과 프랑스인이 서로를 ‘가장 좋아하는 이웃’으로 꼽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의 역사를 돌아보며 최근 격화되고 있는 한-일 갈등을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도 독일과 프랑스처럼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인가. 1965년 ‘한일협정’에 기초한 현재의 조건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진정한 화해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한일협정의 주도자가 역사적 정당성을 결여했기 때문이다. 1963년 독불협정과 1965년 한일협정의 결정적인 차이는 피해국 수장의 역사적 상징성에 있다. 프랑스의 드골은 레지스탕스의 지도자였고, 한국의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였던 것이다. 브란트가 나치 과거를 청산하고 주변 국가와 화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바르샤바 게토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나치와 맞서 싸운 반나치 투사였기 때문이다. 둘째, 한일협정은 ‘강요된 화해’의 산물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후속 조치로서 한일협정은 냉전시대 미국의 군사전략적 고려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지,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니었다. 셋째, 한일협정은 국민의 동의에 기초한 조약이 아니었다. 협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거듭된 것은 한일협정이 국민의 뜻을 거스른 ‘관제 협정’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일협정은 반성 않는 일본 우익과 성찰 없는 한국 수구의 ‘거짓 화해’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한일협정을 절대적 준거인 양 내세우며 한국 정부를 비판하고 일본 정부를 옹호하는 인사들은 올바른 역사의식도, 상식적 법감정도 결여한 자들이다. 현재의 한-일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수출규제 때문에 촉발되었지만, 심층적으로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누적된 적대적 반감이 폭발한 것이다. 사실 해방 이후 한-일 간에 진정한 화해의 시도는 전무했다. 냉전 시대에 ‘군사동맹’이라는 허울 아래 덮여 있던 적대감이, 냉전에 기생하는 한국의 수구와 일본의 극우의 결탁으로 수면 아래 은폐되어 있던 갈등이 이제 냉전체제가 해체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아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은 하겠다”는 국민들의 정당한 분노가 희망이다. 이것이 과거청산과 동북아평화의 성숙한 정치의식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민주시민교육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더 이상 미국에 중재를 ‘구걸’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최선의 경우라도 냉전적 과거 질서로의 회귀를 낳을 뿐이다. 한-일 갈등의 궁극적 해결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로의 도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일본이 동북아 안보협력의 근간을 흔든다”는 식으로 냉전질서의 붕괴를 염려할 일이 아니라, 탈냉전의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모색해야 한다.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려면 한-일 신협정 체결을 통해 새로운 한-일 관계가 정립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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