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7.31 18:15
수정 : 2019.07.31 19:08
한국과 일본 정부의 갈등은 생각보다 훨씬 구조적이고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 지식인들 성명이 신선한 건,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의 교류와 연대로 두 나라 관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성명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과 일본은 ‘이웃 나라’일 수밖에 없다.
박찬수
논설위원실장
지난 25일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 75명이 아베 신조 총리에게 “일본 국민과 한국 국민의 사이를 찢고 양 국민을 대립 반목시키는 것을 그만두라”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건, 가뭄의 단비 같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한국은 적인가’라는 성명 제목처럼, 한-일 두 나라는 ‘가깝고도 먼 이웃’에서 이제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는 기로에 있다. 일본 각의가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결정을 내리면, 두 나라 관계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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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식인들이 올 2월6일 도쿄 지요다에 있는 중의원 제2 의원회관에서 “식민지 지배 사죄가 한-일관계의 열쇠”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이들이 최근 아베 정권의 무역규제를 비판하는 지식인 성명을 주도했다. 왼쪽부터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우치다 마사토시 변호사, 가스야 켄이치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오다가와 코코 재한피폭자문제시민회의 대표, 우츠미 아이코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 도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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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성명이 일본 주류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지는 알 수 없다.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 언론은 지식인 성명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갈수록 보수화하는 일본 사회에서 양심적 인사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칠 공간은 매우 협소해 보인다. 그럼에도 한-일 관계를 걱정하는 일본 지식인들 목소리가 다시 울리는 건 다행스럽고 뜻깊은 일이다. 처음 성명 취지에 찬성해 서명한 이는 75명이었지만, 6일이 지난 31일 오전엔 그 수가 4700명을 넘어섰다. 결코 외롭지 않은, 의미 있는 진전이고 확산이다.
물론, 아베 총리가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취소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최근 일본을 방문해 정부와 학계 인사들을 만났던 전직 정부 고위관계자는 “일본 쪽 분위기가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다. 쉽게 바뀔 거 같지도 않다”고 전했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합의와 실패 과정을 죽 지켜본 일본 정부는, 한국의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 근본적으로 관계 재정립을 추구하고 있다고 이 인사는 분석했다. 이 인사는 “아베 정부는 궁극적으로 1965년 체결한 한-일 협정 체제의 유효성을 분명하게 재확인하라는 요구를 한국에 해올 것”이라고 관측했다. 지금의 갈등은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뛰어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근본적 인식 차가 드러난다.
일본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3년 1월, 야스쿠니신사에 불을 지른 중국인 류창을 한국 정부가 일본에 인도하지 않고 중국으로 돌려보낸 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의 부상으로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전선이 본격화하는 시점에 한국이 중국을 택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법원은 류창을 단순한 방화범으로 보지 않았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항의하려 방화한 일종의 ‘정치범’으로 봤다. “한국과 범죄인인도협정을 맺은 게 무슨 소용이냐”고 일본은 격하게 항의했지만, 동병상련의 침략 피해를 당한 한국이 ‘류창 사건’을 일본의 청산하지 않은 과거사와 연결시켜 바라보는 건 당연했다.
지금도 비슷하다. 일본은 1965년 한-일 협정 체제의 정당성을 인정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적 인권과 개인 권리를 무시한 협정을 그대로 따르라는 건, 한국의 민주화와 세계적 흐름을 외면하는 행동이다. 피해자의 존엄성과 인권에 주목해서 이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건 냉전 이후 국제사회의 엄연한 추세다. 물론, 반세기 넘게 한-일 관계의 기본이라 여긴 협정을 당장 무효화할 수는 없다. 협정 체결 과정에서 과거 정권이 잘못한 일을 지금의 정부가 ‘나 몰라라’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미래를 향해 협정을 전향적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은 필요하고, 그게 일본의 품격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1965년 체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모습은 아베 정부뿐 아니라 한국 보수세력에서도 엿보이지만, 일본이 그런 움직임에 주목하는 건 시대를 거스르는 판단착오다.
일본 지식인들 성명이 신선한 건, 정부 간 갈등이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시민들의 교류와 연대로 두 나라 관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성명에서 언급했듯이, 한국과 일본은 ‘이웃 나라’일 수밖에 없다. 우쓰노미야 겐지 전 일본변호사연합회 회장이 <한겨레> 인터뷰에서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은 한계가 있기에 시민 차원의 관계 개선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 건 의미심장하다.
한국에서도 이부영 전 의원을 비롯해 여러 그룹이 시민 연대를 가시화하려는 노력을 펴고 있다. 아베 정부가 금지선을 너무 쉽게 넘어버렸기에, 국내에선 독자 목소리를 내기보다 문재인 정부에 힘을 실어주며 지켜보자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그래도 앞으로 한-일 갈등의 위태로운 고비를 넘으려면, 시민 연대가 절실하다. 과거 한국 민주화운동 시절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했던 일본 시민사회의 저력이 다시 피어나길 기대한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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