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6 16:37
수정 : 2019.08.0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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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5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2018 일본 취업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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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취업 구직자들 “취업길 막혀 막막하고 허탈” 반응
서울 도심 ‘노 재팬’ 깃발 철수에 2만여명 국민청원 동의
전문가들 “관·민간의 외교대응 ‘투트랙’으로 나뉘어야”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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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5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2018 일본 취업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채용정보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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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아이티(IT) 대기업 정규직 개발자 채용은 경쟁률이 300대 1이에요. 신입을 뽑는 곳이 너무 없어서 현실적으로 일본 취업을 생각하게 된 건데, 외교 갈등 때문에 정부가 나서서 자국 청년들의 국외 취업 길을 막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요?”
이달 말 서울의 한 사립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할 예정인 ㄱ(27)씨는 다음 달 서울 코엑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019 하반기 글로벌 일자리 대전’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분통을 터뜨렸다. 다수의 일본·아세안 기업들이 참가하는 이 박람회는 국내에서 일본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 구직자들에게 사실상 ‘입사 면접’의 기회가 주어지는 대형 행사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5일 일본 정부의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우대국) 제외 조처에 따른 ‘경제전쟁’을 의식해 “일본만을 대상으로 하는 하반기 취업박람회는 하지 않을 계획”(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이라고 밝혔다. 고용노동부의 설명을 보면, 최근 3년간 정부의 취업박람회, 국외연수 프로그램 등을 통해 국외 취업에 성공한 청년 구직자 1만5712명 가운데 일본 취업자는 4358명(27%)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ㄱ씨는 “사기업도 아니고 정부와 공기업이 10년 넘게 주관해 온 행사가 접수 기간에 갑자기 취소되다니 믿기지 않는다”며 “가뜩이나 취업이 어려워 걱정인데, 청년들의 국외 취업이 일본에 ‘협박용’ 카드로 쓰인 것 같아 황당하다”고 말했다. 내년 2월 일본어학과 졸업을 앞두고 지난 상반기 때 취업박람회에 참가했다는 대학생 박아무개(25)씨도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울 때 일본 기업 수백곳이 참여하는 취업박람회마저 취소되면 일본어 전공자들은 앞길이 막막하다”며 “국민으로서 이해는 되지만, 허탈하고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부와 민간 차원의 문제를 나눠 생각해야 한다고 했던 정치인들의 말은 뭐였나 싶다”고 하소연했다.
일본의 수출규제 등에 따른 ‘노 재팬’(No JAPAN) 운동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확산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의 ‘과잉 대응’을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외교적 협상 과정에서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는 민간 차원의 자발적 불매운동과 달리, 관이 주도하는 방식의 보이콧 운동은 자칫 국내·외 한국인들의 피해를 야기하거나 국제 관계에서 일본에 또 다른 ‘공격’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서울 중구청의 ‘노 재팬’ 깃발 설치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도 같은 맥락이다. 서울 중구청은 5일 관광 명소인 명동과 청계천 일대에 ‘보이콧 재팬’ 이미지가 들어간 깃발 1100개를 설치하겠다고 밝히고 실제로 6일 오전 설치에 들어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국민의 ‘노 재팬’은 찬성하나 관에서 하는 건 반대합니다”, “아베 정부를 반대해야지 일본인을 반대해선 안 됩니다” 등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깃발 설치를 거세게 비판했다. 5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서울 한복판에 노 재팬 깃발을 설치하는 것을 중단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돼 6일 오후 4시 기준 1만7000여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청원자는 이 글에서 “서울 중심에 ‘노 재팬’ 깃발이 걸리면 일본 관광객들의 불쾌감이 커지는 등 자국의 무역도발에 찬성하는 일본 시민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며 “국민들의 자발적 불매운동을 정부가 조장하고 있다는 그림은 향후 정부의 국제여론전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중구청은 결국 6일 오후 깃발 설치를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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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오전 서울 중구청 공무원들이 중구 세종대로에 노 재팬 깃발을 걸고 있다. 서울 중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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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이번 ‘경제전쟁’ 사태와 관련한 관과 민간의 대응이 ‘투 트랙’으로 나뉘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불매운동은 일어날 수 있지만, 정부나 공공기관이 지금과 같이 과열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 협상 등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고, 사태가 장기화했을 때 국제여론전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최근 정부가 직접 대응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동안 우리가 한-일 문제와 관련해 쌓아온 국제사회의 신뢰가 하락할 상황인 만큼 자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기정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역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처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해야 할 역할은 이번 사태가 산업에 끼칠 부정적 영향에 대비하는 것인지 민간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일운동에 나서는 게 아니다”라며 “서울 중구청의 ‘노 재팬’ 깃발처럼 관이 나서게 되면 우리가 설득해야 할 일본 국민들을 돌아서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아베 정부의 정치적 결정이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선담은 오연서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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