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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7 21:22 수정 : 2019.08.07 22:16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오후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에스비비(SBB)테크를 찾아 생산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반도체와 로봇 등 정밀제어에 필요한 감속기와 베어링 등을 생산하는 이 업체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던 로봇용 ‘하모닉 감속기’(정밀 설계와 가공 기술을 적용해 높은 회전 정밀도와 저진동, 저소음을 구현하는 감속기)를 국내 처음으로 개발했다. 김포/청와대사진기자단

‘대기업 주도 기술개발’ 앞세운 국산화 대책
소재·장비 중소기업 “대기업 전횡 우려”
최저가경쟁·실적 급급…기술 확보는 뒷전
“중소기업 주체로 세우고 관리감독해야”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오후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에스비비(SBB)테크를 찾아 생산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반도체와 로봇 등 정밀제어에 필요한 감속기와 베어링 등을 생산하는 이 업체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하던 로봇용 ‘하모닉 감속기’(정밀 설계와 가공 기술을 적용해 높은 회전 정밀도와 저진동, 저소음을 구현하는 감속기)를 국내 처음으로 개발했다. 김포/청와대사진기자단
“일본산을 잘 쓰고 있어서 바꿀 이유가 없다는 대기업 태도에 개발 계획을 접었다.”(반도체 핵심소재 생산 ㄱ기업)

“(거래 대기업들은) 타사에 납품한 적이 있는지, 타사보다 값이 싼지를 먼저 확인한다.”(삼성·에스케이(SK)하이닉스 납품 기업)

정부가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을 전제로 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국산화 대책을 내놓았지만,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 중소기업은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과 함께 과거의 실패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교차한다. <한겨레>와 만난 관련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혁신 기술보다 저가로 안정적인 기술 수급을 원하는 국내 대기업들의 관행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기술 독립’은 먼 길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중소기업의 원천기술 확보를 돕기보다는 단가 경쟁에 주력해온 대기업들이 기술과제 발굴에서부터 평가·개발 임무까지를 도맡는 방식은 안 된다는 것이다.

■ 저가·단기 기술개발 편향 막아야

가장 큰 우려는 기술과제 선정 과정에서 대기업 이해관계에 따라 이미 검증된 기술이나 단가를 낮추는 기술이 우선 선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정부는 대기업에 기술 로드맵을 제시하도록 권한을 줬지만 구체적인 기술 목표는 제시하지 않았다. 지난달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는 ‘일본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사태에 대한 분석 및 대안’ 보고서를 통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는 한국 재료 회사에 기술적 지원에 대해 인색하고 특히 차세대 재료에 대해서는 함께 개발하려 하지 않는다”며 “비용 절감을 위해서만 중기를 활용한다”고 지적했다. 재료 국산화를 검토했거나 중국산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한 ㄱ기업과 ㄴ기업이 ‘일본산을 잘 쓰고 있어서 바꿀 이유가 없다’는 두 대기업의 태도에 개발계획을 접었다고도 덧붙였다.

10년 동안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와 거래했다는 ㄷ대표는 “혁신기술을 가져와도 ‘타사에 납품한 적 있는지’ ‘타사보다 싼지’를 먼저 확인하려 한다”며 “대기업이 과제 선정을 맡을 경우 기존 기술 위주로 쓰려는 관성이 강해 혁신기술 개발에 소극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ㄹ대표는 “공동개발을 지금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문제는 기술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싼값에 가져가려 하는 것”이라며 “아주 작은 소모품까지 제조회사, 부품번호, 단가를 하나씩 제출하게 만들거나 무상으로 기기를 납품받은 뒤 실험용으로 쓰는 사례도 부지기수”라고 주장했다.

대기업의 소극적인 과제 참여도 문제로 지목됐다. 디스플레이 부품을 만드는 ㅁ대표는 “구매조건부 사업 지원을 받고 기술 개발 준비를 했는데 막판에 도장을 안 찍어줘 사업을 접었다”며 “대기업 의지만 기다렸다가 계획이 뒤집히는 경우가 잦다”고 했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가 2012년부터 2019년 8월까지 반도체 기업들의 구매조건부 연구개발(R&D) 수주 현황을 집계한 결과 에스케이하이닉스는 0건, 삼성전자는 35건, 삼성디스플레이는 48건이었다. 연간 중소기업 지원 건수가 4∼6곳에 그쳤다는 뜻이다.

■ 대기업 ‘테스트 장비’ 활용도 늘려야

이번 정부 대책으로 중기업계 숙원인 ‘테스트 장비’ 부족이 해소될지도 미지수다. 정부가 대기업 양산라인 일부를 활용해 중소기업 제품을 평가하겠다고 밝혔지만 관련 중소기업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고가의 장비를 내줘야 해 대기업 참여도가 낮은데다 중소기업 처지에서도 잠재적인 구매처에 개발이 덜 된 제품을 들고 가기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대기업 양산라인을 활용하겠다며 만든 ‘패턴웨이퍼’와 ‘성능평가’ 사업은 연 1~2회에 그쳐 긴박한 산업현장 시간표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나마 실리콘반도체를 주력으로 하는 대전 나노종합기술원에 대기업 주요 공정인 12인치 공정을 새로 도입하지만 중기 전체 수요를 받기엔 역부족이다.

협력사를 선정할 때 저가 경쟁 입찰을 활용하는 관행도 기술 개발과 혁신을 막는 걸림돌이다. 대기업들이 협력사와 손잡고 기술을 공동개발해 최종 양산까지 이끌어내더라도 그 과정에서 ‘최저가 입찰 경쟁’을 붙이면 양질의 협력사가 탈락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인호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저가 경쟁이 지속되면 기술 개발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에 기술 목표를 충분히 알리고 가격이 아닌 기술로 승부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 “정부-중기 주도 생태계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대기업에 중소기업 육성 과제를 일임할 게 아니라 정부가 중기 중심으로 ‘중재 플랫폼’을 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외국의 얼라이언스 모델과 달리 국내는 대기업-중소기업 전속거래가 고착화돼 있어 불공정거래가 수반될 가능성이 높다”며 “대기업 주도 정책이 간편할 수는 있겠지만 공동개발 주관사를 중소기업으로 선정한다거나 여러 업체를 모아 공동연구를 하는 등 보완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이번 대책에 대기업-중소기업 컨소시엄이 포함됐는데 현재도 상생 프로그램은 있다. 효과가 없는 것뿐”이라며 “대기업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유인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 대책 가운데 하나인 ‘대기업-정부 공동시설 투자’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김학수 호서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대기업과 직접 협력 체계를 구축하기보다는 장비를 기부받거나 자금을 투자받아 별도의 중소기업 생태계를 꾸리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며 “박사급 인력과 테스트베드를 갖춘 나노팹을 중심으로 정부가 중소기업 전용 기술개발·평가·양산 체계를 갖추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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