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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8 16:41 수정 : 2019.08.08 17:12

반도체 생산라인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반도체 연구회 “재료 회사에 기술지원 없는 대기업 문제”
협력업체들 “대기업, 중소기업 기술 싼값에 가지려고만”
민주당 내부에서도 ‘대기업 소원수리’ 비판 나와

반도체 생산라인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일본의 황당하고 무례한 행위에 대한 대처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과 필수·필요 산업 규제 완화라니 황당합니다. 아직도 사람 건강과 목숨을 갈아 넣어야 하는 시대입니까? 사람이 부족하면 더 채용해야지 노동시간 연장이라뇨?”(@bonna****)

“왜 맨날 국가위기 때마다 노동자들만 피해를 보고 양보를 해야 하는지 설명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oi****)

최근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 조처에 대한 대응책으로 국내 기업의 ‘기술독립’을 위해 연구·개발(R&D) 노동자들의 특별연장근로를 인가하기로 발표한 데 대해 노동계와 누리꾼들의 비판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사람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기술 개발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반도체 노동자들이 주 52시간제 보장을 희생하면 일본산 부품·소재의 국산화에 성공할 수 있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문가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기술 독립’의 근본적 대책이 따로 있다고 입을 모읍니다.

지난달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연구회)가 발표한 ‘일본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사태에 대한 분석 및 대안’ 보고서를 보면, 한국에서 일본의 수출 규제 품목 3개 가운데 하나인 이유브이(EUV) 포토레지스트가 제대로 개발되지 못한 이유로 ‘기술 지원에 인색한 반도체 대기업’을 지목했습니다.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반도체 재료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을 비용 절감 목적으로만 활용할 뿐, 차세대 재료를 함께 개발하기 위해 이들에게 기술적인 지원을 해주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대기업 입장에서 ‘장사 밑천’인 기술에 대해 보안을 지키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요? 일본의 사례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일본의 포토레지스트 생산 업체들은 자국 반도체 기업들의 기술적인 지원을 발판 삼아 성장해왔습니다. 연구회의 설명을 보면, 일본의 경우 포토레지스트에 들어가는 10여 가지 원재료를 중소 화학회사가 만들면, 포토레지스트 회사는 이를 조합해 반도체 기업이 요구하는 조건의 제품을 생산합니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기업들은 테스트 결과를 공유하는 등 포토레지스트 기업들이 기술 노하우를 축적하고 문제점을 신속하게 개선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회사들에 소재·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들이 겪는 상황은 일본 기업들과 다릅니다. <한겨레>와 만난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중소기업의 원천기술 확보를 돕기보다는 단가 경쟁에 주력해온 대기업들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10년 동안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와 거래했다는 한 협력업체 대표는 “(거래 대기업들은) 혁신기술을 가져와도 (대기업은) ‘타사에 납품한 적 있는지’ ‘타사보다 싼지’를 먼저 확인하려 한다”고 답답한 상황을 호소했습니다. 또 다른 협력업체의 대표도 “(반도체 대기업과) 공동 개발을 지금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문제는 기술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싼값에 가져가려 하는 것”이라며 “아주 작은 소모품까지 제조회사, 부품번호, 단가를 하나씩 제출하게 만들거나 무상으로 기기를 납품받은 뒤 실험용으로 쓰는 사례도 부지기수”라고 주장했습니다. (▶관련 기사: 국산화 대책에도…“대기업 저가경쟁 멈춰야 기술독립 가능”) 이 때문에 연구회는 반도체 기업들과 소재·부품 중소기업이 공동연구를 진행하는 등의 협업을 ‘기술독립’을 위한 개선점으로 제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미 법 개정 없이도 기업들이 주 52시간제 예외조항을 폭넓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발표한 데 이어 최근엔 더불어민주당이 법을 바꿔 주 52시간제 예외조항을 항구적으로 넓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현재 연구개발 분야 종사자의 경우 ‘노사 합의’를 전제로 주 52시간 이상 근무를 할 수 있는데, 관련법에서 ‘노사 합의’ 조항을 삭제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민주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더불어민주당 간사인 한정애 의원은 7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기업들의 오랜 민원인 주 52시간제 완화가 일본의 수출규제 상황에서 이뤄지는 것을 우려하며 “법을 통해 제도화한 건 이미 그 사안에 대해 오랫동안 갈등을 조정해 완성한 것이다. 이 사태를 ‘빌미’로 (의원들이) 경영계가 요구하는 내용의 법안을 소원수리 방식으로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관련 기사: 이 틈에 환경·노동 규제 풀자? 민주당 안에서도 비판)

“지금이 노동집약 산업을 일으키는 산업화 시대인가. 아니면, 연구원들 연구실에 몇 달씩 처박아 결과를 짜내는 개발도상 시대인가. 산업 근본 경쟁력은 기껏 중소업체가 개발한 기술을 재벌회사가 강탈해가는 산업구조를 바꾸는 것이 시작이다.”(지난달 22일 민주노총의 논평)

지난달 말 민주노총이 발표한 논평이 지적했듯 2019년은 산업화·개발도상 시대도 아니고, 전문가와 반도체 기업 협력업체들도 다른 문제를 지적하는데 정부는 왜 ‘기술독립’을 외치며 엉뚱한 주 52시간제 완화를 추진하는 것일까요? 한정애 의원의 말대로 ‘대기업의 소원수리’ 때문이라면 노동자의 희생은 누가 책임질까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선담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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