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일본의 수출 규제 직후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언급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대통령을 무능한 임금에 빗대며 맞섰다. “12척의 배로 싸워야 했던 이순신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그의 비유 속에서 이순신의 위치는 교묘하게 재조정됐다. <제이티비시> 뉴스에서 손석희 앵커는 “누가 이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이순신의 역할을 쟁탈하기 위한 줄다리기에 우려를 표했다. 결국 왜란을 이겨낸 것은 민초들의 작은 어선이라는 것이었다. 새 비유에서는 시민들이 어선을 타고 이순신을 따랐던 의병이 되었다. 호국영웅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에서만 등장한다. 국가 간 전쟁의 관점을 취한다면 전략적 손익의 계산이 중요할 것이다. 일단 벌어진 이상 전쟁은 이기고 봐야 하므로. 국내 반도체 산업이 입을 손실은 얼마만큼인가? 일본 산업에 되돌아갈 악영향은? 한국 경제의 역량은 일본과 맞서기에 충분한가? 우리의 필승 카드, 우리가 가진 거북선은 무엇일까? 일본의 관광수입 손실은 아베 정부에 타격을 입힐까? 불매운동만으로 충분할까? 지소미아 종료로 미국을 아군 중재자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적을 어디까지로 설정해야 하는가? 아베 정부인가? 아베 정부를 지지하는 일본 국민들도 포함되는가? 가능한 관점일 수도 있고 다수의 관점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관점을 취해볼 수도 있다. 이것을 개인 대 국가의 전쟁으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을 취한 이들은 개인의 권리를 되찾는 판결 하나 따위에 무엇을 걸 수 있겠냐는 일본 정부의 질문에 ‘모든 것’이라고 대답하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의 옆에 서 있다. 열두척의 배를 지휘했던 이순신의 초상화보다, 재판 도중 세상을 떠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영정사진이 등장할 때 더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살아남은 단 한명의 강제징용 피해자의 편에 선 사람들은 구국의 의병대와는 거리가 멀다. 강제징용 문제가 개인 대 국가의 전장에 머무는 동안, 일본 시민사회에서 나온 양심의 목소리는 일본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선을 한국 대 일본 사이에 고정시키면 시민의 양심이 자리할 곳이 없다. 어쩌면 아베 정부는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존엄을 침해한 강제징용에 대한 판결로 촉발한 전쟁이, 머리채를 붙잡힌 일본인이 존엄을 잃은 포로의 모습으로 길바닥에 끌려다니는 국면에 도달하기를. 한일전의 양상에 과몰입하는 양국 국민이 늘어날수록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순신에게는 열두척이라도 배가 있었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은 단 한척의 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의 청구권은 국가 간 조약으로 포기될 수 없다고 적힌 판결문 한 부를 들고 있을 뿐이다. 판결문을 작성하는 동안 대법관들 역시 법의 역량을 까마득히 넘어선 위험한 도전에 임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마지막 문단은 법이 아닌 호소의 언어로 쓰여 있다. “…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 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고 그 실상을 조사·확인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청구권 협정을 체결한 것일 수도 있다. 청구권 협정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하지 않은 책임은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피해자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이 판결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과 같다. 전쟁의 포화에 가리지 않도록 근본적인 질문이 끊임없이 되불려나와야 한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두 국가의 약속이 인간의 존엄에 관한 권리를 소멸시킬 수 있는가? 명량의 불바다만 떠올리면 반세기 만에 발굴한 질문들의 의미는 증발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이겨도 승자의 이름은 인간이 아닌 국가로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칼럼 |
[공감세상] 이순신의 전쟁, 이춘식의 전쟁 / 손아람 |
작가 일본의 수출 규제 직후 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순신은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언급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대통령을 무능한 임금에 빗대며 맞섰다. “12척의 배로 싸워야 했던 이순신의 마음을 헤아려달라”는 그의 비유 속에서 이순신의 위치는 교묘하게 재조정됐다. <제이티비시> 뉴스에서 손석희 앵커는 “누가 이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이순신의 역할을 쟁탈하기 위한 줄다리기에 우려를 표했다. 결국 왜란을 이겨낸 것은 민초들의 작은 어선이라는 것이었다. 새 비유에서는 시민들이 어선을 타고 이순신을 따랐던 의병이 되었다. 호국영웅은 국가 대 국가의 전쟁에서만 등장한다. 국가 간 전쟁의 관점을 취한다면 전략적 손익의 계산이 중요할 것이다. 일단 벌어진 이상 전쟁은 이기고 봐야 하므로. 국내 반도체 산업이 입을 손실은 얼마만큼인가? 일본 산업에 되돌아갈 악영향은? 한국 경제의 역량은 일본과 맞서기에 충분한가? 우리의 필승 카드, 우리가 가진 거북선은 무엇일까? 일본의 관광수입 손실은 아베 정부에 타격을 입힐까? 불매운동만으로 충분할까? 지소미아 종료로 미국을 아군 중재자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적을 어디까지로 설정해야 하는가? 아베 정부인가? 아베 정부를 지지하는 일본 국민들도 포함되는가? 가능한 관점일 수도 있고 다수의 관점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관점을 취해볼 수도 있다. 이것을 개인 대 국가의 전쟁으로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을 취한 이들은 개인의 권리를 되찾는 판결 하나 따위에 무엇을 걸 수 있겠냐는 일본 정부의 질문에 ‘모든 것’이라고 대답하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의 옆에 서 있다. 열두척의 배를 지휘했던 이순신의 초상화보다, 재판 도중 세상을 떠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영정사진이 등장할 때 더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살아남은 단 한명의 강제징용 피해자의 편에 선 사람들은 구국의 의병대와는 거리가 멀다. 강제징용 문제가 개인 대 국가의 전장에 머무는 동안, 일본 시민사회에서 나온 양심의 목소리는 일본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전선을 한국 대 일본 사이에 고정시키면 시민의 양심이 자리할 곳이 없다. 어쩌면 아베 정부는 간절히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존엄을 침해한 강제징용에 대한 판결로 촉발한 전쟁이, 머리채를 붙잡힌 일본인이 존엄을 잃은 포로의 모습으로 길바닥에 끌려다니는 국면에 도달하기를. 한일전의 양상에 과몰입하는 양국 국민이 늘어날수록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순신에게는 열두척이라도 배가 있었지만,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은 단 한척의 배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의 청구권은 국가 간 조약으로 포기될 수 없다고 적힌 판결문 한 부를 들고 있을 뿐이다. 판결문을 작성하는 동안 대법관들 역시 법의 역량을 까마득히 넘어선 위험한 도전에 임하고 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마지막 문단은 법이 아닌 호소의 언어로 쓰여 있다. “…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 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지나치게 가볍게 보고 그 실상을 조사·확인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청구권 협정을 체결한 것일 수도 있다. 청구권 협정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하지 않은 책임은 협정을 체결한 당사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피해자들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이 판결은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과 같다. 전쟁의 포화에 가리지 않도록 근본적인 질문이 끊임없이 되불려나와야 한다. 한-일 청구권 협정은 어디까지 유효한가? 두 국가의 약속이 인간의 존엄에 관한 권리를 소멸시킬 수 있는가? 명량의 불바다만 떠올리면 반세기 만에 발굴한 질문들의 의미는 증발할 수밖에 없다. 누가 이겨도 승자의 이름은 인간이 아닌 국가로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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