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교육대 교수 여러 사람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때, 논의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자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논의가 산으로 가기도 한다.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지정 평가 결과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자사고를 폐지하면 수월성 교육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자사고는 수월성 교육을 위해 설립된 것은 아니다. 강북 자사고가 여럿 좋지 않은 평가 결과를 받아들게 되자 강남 8학군 시절을 떠올리며 강남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수능 중심의 대입을 치르던 당시와 학생부가 중요해진 지금은 다르다. 자사고 논란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한곳에 모아서 공부하도록 하는 일과 그 학생들을 여러 학교에 분산하여 공부하도록 하는 일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가라는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문제가 된다. 자신의 성적에 따라 어느 쪽이 더 유리할지 계산하게 되는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정부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어느 편이 바람직한가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대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역사적 경험이 있다. 자사고와 같은 명문고는 평준화 이전에 오랫동안 존재했다. 박정희 정부가 평준화 정책을 시행했을 때, 명문고가 사라지고 우수 인재를 기르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오늘 이상으로 비등했다. 몇 되지 않는 명문학교는 해방 직후부터 줄곧 명문학교였다. 우수한 인재를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평준화 전까지 명문고의 지위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3류 학교’로 불리던 여러 학교에는 패배 의식에 젖어 교문을 들어오는 학생들과 의욕을 잃어버린 교사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평준화가 시행되면서 학업에 열의가 있는 학생들이 여러 학교로 분산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서울 강북의 한 ‘3류 학교’에서는 교사들의 수업에 반응하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교사들이 먼저 힘을 냈다. 곧이어 또래 학생들에게도 좋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학교는 평준화 이후 첫 입학생이 치른 대학입시에서 서울 시내에서 서울대 입학생을 두번째로 많이 배출했다. 자사고 정책을 밀어붙인 이주호 전 교육부 장관은 “평준화로 학교 간 경쟁은 사라지고 학생만 경쟁하게 되었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러나 평준화 이후 학교 간 경쟁이 외려 활성화됐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오히려 평준화 이전에 학교 간 경쟁이 없었다. 평준화 효과에 관한 연구 결과는 평준화 정책이 학생들의 학력을 전체적으로 높였으며 정서 발달에도 긍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선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평준화에 ‘하향’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붙게 된 데에는 다양한 이유에서 평준화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사고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한 지역의 도지사는 지난해 그 지역 교육감에게 전국 단위 자사고 설립을 제안했다. 명문고가 없어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획득하고 사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출신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타당성이 약한 사업에 재정을 투입하는 일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의대에 많이 입학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지방의 어느 전국 단위 자사고 졸업생들이 자신이 다닌 학교가 있는 지역에 연고 의식을 느낄 가능성도 높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여전히 평준화 이전에 머무르고 있다. 여러 나라의 경험은 학교가 분리되면 사회가 분리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미 지금도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란다. 면학 분위기를 갖춘 학교를 찾기 어렵다는 학부모의 불만에는 특별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러 교육청이 학교 혁신 정책을 펴면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대하고 성장시키는 학교가 생겨나고는 있지만, 그 수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더 나은 고등학교 체제에 관한 논의를 심화하고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칼럼 |
[시론] 평준화 경험과 자사고 논란 / 김용 |
청주교육대 교수 여러 사람이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때, 논의의 본질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있다. 각자 자신의 이해에 부합하는 내용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논의가 산으로 가기도 한다. 자율형사립고(자사고) 재지정 평가 결과를 둘러싼 논란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자사고를 폐지하면 수월성 교육은 어떻게 하느냐는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자사고는 수월성 교육을 위해 설립된 것은 아니다. 강북 자사고가 여럿 좋지 않은 평가 결과를 받아들게 되자 강남 8학군 시절을 떠올리며 강남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수능 중심의 대입을 치르던 당시와 학생부가 중요해진 지금은 다르다. 자사고 논란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만 한곳에 모아서 공부하도록 하는 일과 그 학생들을 여러 학교에 분산하여 공부하도록 하는 일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바람직한가라는 문제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문제가 된다. 자신의 성적에 따라 어느 쪽이 더 유리할지 계산하게 되는 문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정부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어느 편이 바람직한가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를 대할 수 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역사적 경험이 있다. 자사고와 같은 명문고는 평준화 이전에 오랫동안 존재했다. 박정희 정부가 평준화 정책을 시행했을 때, 명문고가 사라지고 우수 인재를 기르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오늘 이상으로 비등했다. 몇 되지 않는 명문학교는 해방 직후부터 줄곧 명문학교였다. 우수한 인재를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평준화 전까지 명문고의 지위는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반면 ‘3류 학교’로 불리던 여러 학교에는 패배 의식에 젖어 교문을 들어오는 학생들과 의욕을 잃어버린 교사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평준화가 시행되면서 학업에 열의가 있는 학생들이 여러 학교로 분산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서울 강북의 한 ‘3류 학교’에서는 교사들의 수업에 반응하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교사들이 먼저 힘을 냈다. 곧이어 또래 학생들에게도 좋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학교는 평준화 이후 첫 입학생이 치른 대학입시에서 서울 시내에서 서울대 입학생을 두번째로 많이 배출했다. 자사고 정책을 밀어붙인 이주호 전 교육부 장관은 “평준화로 학교 간 경쟁은 사라지고 학생만 경쟁하게 되었다”는 말을 종종 했다. 그러나 평준화 이후 학교 간 경쟁이 외려 활성화됐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오히려 평준화 이전에 학교 간 경쟁이 없었다. 평준화 효과에 관한 연구 결과는 평준화 정책이 학생들의 학력을 전체적으로 높였으며 정서 발달에도 긍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선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평준화에 ‘하향’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붙게 된 데에는 다양한 이유에서 평준화 정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사고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한 지역의 도지사는 지난해 그 지역 교육감에게 전국 단위 자사고 설립을 제안했다. 명문고가 없어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획득하고 사업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일하는 사람이 자신의 출신 지역이라는 이유만으로 타당성이 약한 사업에 재정을 투입하는 일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의대에 많이 입학시키는 것으로 유명한 지방의 어느 전국 단위 자사고 졸업생들이 자신이 다닌 학교가 있는 지역에 연고 의식을 느낄 가능성도 높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여전히 평준화 이전에 머무르고 있다. 여러 나라의 경험은 학교가 분리되면 사회가 분리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미 지금도 자신들만의 성을 쌓고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살기를 바란다. 면학 분위기를 갖춘 학교를 찾기 어렵다는 학부모의 불만에는 특별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러 교육청이 학교 혁신 정책을 펴면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하게 대하고 성장시키는 학교가 생겨나고는 있지만, 그 수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더 나은 고등학교 체제에 관한 논의를 심화하고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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