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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23 09:49 수정 : 2019.09.23 14:47

과도한 육식과 그 수요를 맞추기 위한 대규모 공장식 축산이, 이제 인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도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돼지들. 게티이미지뱅크

[애니멀피플] 영화감독 황윤 기고

과도한 육식과 그 수요를 맞추기 위한 대규모 공장식 축산이, 이제 인류 생존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도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돼지들. 게티이미지뱅크

치사율 100%에 이르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국내에서도 발생했습니다. 정확한 발병 원인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고, 발생 농가 인근 수천 마리의 돼지들은 살처분을 당했습니다. 공장식 축산으로 고통받는 돼지를 다룬 영화 <잡식 가족의 딜레마>를 연출하고, 최근 책 <사랑할까, 먹을까>를 펴낸 황윤 감독이 이번 아프리카돼지열병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은 글을 보내왔습니다.

아기가 돌을 앞두고 있던 2009년 말 전염병이 돌았다. 처음에는 언론에서 ‘돼지독감’이라고 하더니 어느 순간 ‘신종플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내가 당사자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조금씩 사태가 심각해졌다. 멕시코에서는 사망자가 150명을 넘어서고 순식간에 미국, 유럽으로 확산하면서 세계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호흡기를 통해 전파되는 이 플루는 갑작스러운 고열, 두통, 근육통을 일으키고 특히 어린이, 면역력이 약한 사람에게 치명적이라 했다. 2009년 5월 한국에서 환자가 나왔다. 7월 국내 감염자 수가 2000명을 넘어섰다. 8월 국내 첫 사망자가 발생했다. 10월 초등학생이 사망했다. 휴교하는 학교가 늘고, 전염병 단계가 ‘심각’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엄마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어느 날 내 아기가 열이 났다. 체온이 순식간에 39도를 넘어섰다. 겁이 났다. 응급실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였다. 생후 11개월이었다.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을까, 효과가 없으면 어쩌지, 독한 약일 텐데 후유증은 없을까, 온갖 걱정이 밀려왔다. 다행히 며칠간의 투병 끝에 아기는 호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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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나는 축사, 널브러진 약병들

세계적으로 1만8500명을 희생시키고 국내에서도 263명의 목숨을 앗아간 신종플루, 아니 ‘돼지독감’(swine flu)은, 멕시코의 대규모 돼지농장에서 발생한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이된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했다.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두 돌을 앞둔 2010년 말, 이번엔 구제역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살처분 광풍이 불었다. 돼지독감과 구제역은 비슷하고도 달랐다. 둘 다 돼지를 매개로 한 1급 전염병이지만, 전자는 사람에게 옮았고, 후자는 돼지들만 걸렸다. 구제역으로 아이가 위험할 일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무서웠다. 전염병보다 무서운 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구덩이에 밀어 넣는 잔인함이었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돼지들. 게티이미지뱅크
350만 소, 돼지가 생매장된 그 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내가 즐겨먹던 돈가스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고기’들의 삶을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만들기 시작했고, 한국 땅에서만 1000만이 넘는 돼지들이 밀폐된 공장식 축산에서 초밀도로 사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불편한 진실들을 알게 되었다. 새끼돼지들은 꼬리와 이빨이 잘리고, 수퇘지들은 마취 없는 거세를 당하며, 나와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고 사랑과 고통을 느낄 여성 돼지들이 ‘스툴’이라는 감금 틀에 갇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신되고 출산하고 새끼를 빼앗기고, 그러다 새끼 낳는 ‘성적’이 떨어지면 도살장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양돈 농장에서 나는 숱한 약병을 보았다. 피부병 약, 장 치료제, 호흡기 치료제, 호르몬제 등등. 내가 본 약병들이 모든 농장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햇빛과 바람이 들지 않는 밀폐된 축사에서 수천, 수만 마리의 돼지들을 밀집 사육하는 공장식 축산이 돼지들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질병을 부르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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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열병이 놀라운가

한편으로 나는 공장식 축산이 아닌 소규모 농장도 취재했다. 충북 어딘가에 방목형 돼지농장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새끼돼지가 독수리에게 물려가기도 한다니, 넓은 곳에 돼지를 방목하는 괜찮은 농장인가보다 하는 기대를 갖고 현장에 도착했다. 악취가 진동했다. 파이프를 통해 갈색 죽 같은 형태의 음식물 잔반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돼지들이 그것을 먹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잔반이 섞여 부패한 악취로 토할 것 같았다.

돼지는 굉장히 발달된 후각과 미각을 가진 동물이다. 농장주는 사료 값을 아끼기 위해 음식물 쓰레기로 돼지를 키우는 것이라 했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는 피를 통해 전파된다. 한 방울의 피에도 수백만 개의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누군가 해외에서 ASF 바이러스가 묻은 육포를 갖고 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렸다면, 그리고 그걸 그 농장의 돼지들이 먹었다면? 그 농장을 시작으로 한국의 돼지 농장들은 초토화되었을 것이고 야생의 수많은 멧돼지들도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들. 게티이미지뱅크
비용 절감을 위해 그런 식으로 운영되는 농장이 그곳뿐이었을까. 한국은 언제든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퍼져도 이상하지 않은 국가였던 것이다.

뒤늦게나마 국내에서 돼지 사료로 음식물 잔반이 금지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치사율 100%의 무서운 전염병이다. 공장식 축산 돼지이건, 복지형 농장의 돼지이건, 야생 멧돼지이건, 걸리면 죽는다. 그렇기에 확실하고 빠른 초동대응은 대단히 중요하고 초기의 제한적인 도살 처분은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구덩이에 밀어 넣어 ‘처분’ 하는 폭력을 우리는 언제까지 반복해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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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역, 돼지열병…다음은?

돼지독감(신종플루), 구제역, 아프리카돼지열병... 그다음은 무엇일까? 질병 전문가들은 돼지독감과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조합이 되어 치명적인 인수공통 전염병이 올 수 있음을 경고한다. 현재의 과도한 육식문화를 멈추지 않는 한, 구덩이에 들어갈 다음 차례는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한국인은 연간 75만 마리의 소, 1500만 마리의 돼지, 8억 마리의 닭을 먹고 있다.

한편으론 ‘탈 육식’ 비건(vegan) 문화가 국내외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동물에 대한 착취를 멈추라는 외침에 기후위기에 대한 우려까지 더해져서다.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2050년에는 인류문명이 파멸에 이르고 인간도 멸종에 이를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 속에, 지난주 수백만 명의 세계인이 거리로 나와 ‘기후위기 비상행동’을 했다. 한국에서도 정부의 ‘기후위기 비상사태 선포’를 촉구하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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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육식

지난 8월 열린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 총회에서, 전 세계 과학자 107인이 내놓은 '기후변화와 토지에 대한 특별보고서'가 채택됐다. 보고서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해 기후변화를 저지하려면 붉은 고기 섭취를 줄이고 통곡물, 채소, 과일 위주의 식물성 식단으로 먹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영국 BBC 방송은 "고기와 유제품 위주의 서구식 음식섭취가 지구 온난화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문장을 이번 IPCC 특별보고서의 핵심으로 골라낼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은행에서 수석 자문위원으로 근무한 환경과학자 로버트 굿랜드 박사는 "축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총량의 무려 51%를 차지한다"는 분석 결과를 2009년 월드워치연구소 보고서에 발표한 바 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어떤 이는 고깃값이 오를까 걱정하고 어떤 이는 한국산 삼겹살을 못 먹게 될까 걱정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걱정은 그런 걱정이 아니다. 이제는 이 별에서의 생존을 걱정할 때이고, 그러므로 남의 살 무한리필을 멈춰야 할 때다.

황윤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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