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19 17:27
수정 : 2019.09.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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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87년 1월 5차 사건 현장인 화성 황계리 현장을 경찰이 살펴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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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화성 연쇄살인사건 유력 용의자 특정했다” 밝혀
일각에서 괴담 소환하고 긴급 영화 편성 등 흥밋거리로 소비
“사건 이후 여성 대상 범죄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등에 집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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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87년 1월 5차 사건 현장인 화성 황계리 현장을 경찰이 살펴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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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33년 만에 확인되면서 사건을 향한 관심이 다시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 10명의 여성이 끔찍하게 살해된 범죄가 흥미 위주로 소비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지난 18일 경찰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24년째 부산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아무개(56)씨를 특정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 7월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관련된 현장 증거물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디엔에이(DNA) 분석을 의뢰했고, 5차, 7차, 9차 사건에서 이씨의 디엔에이가 검출됐다고 밝혔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1986년 9월15일부터 1991년 4월3일까지 5년 동안 당시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여성 10명이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뒤 야산이나 농수로, 목초지 등에 유기된 사건을 일컫는다. 13살부터 71살 피해자까지 있었는데, 10대 3명, 20대 3명, 30대와 50대, 60대와 70대가 각각 1명씩 있었다.
범인이 특정된 뒤 2015년 살인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되었음에도 이를 이씨에게 소급 적용할 수 없는 점에 분노하는 반응이 나왔다. 하지만 일부 언론과 에스엔에스(SNS)를 중심으로 ‘괴담’ 등을 거론하며 사건을 쉽게 소비하는 모습도 나왔다. 언론에선 ‘“빨간 옷 입으면 안돼” 화성연쇄살인으로 소환된 괴담들’(<머니투데이>), ‘비 오는 날, 빨간 옷, 자살…화성연쇄살인사건이 불렀던 괴담’(<국민일보>) 등과 같은 제목의 보도가 나왔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현장 수사 책임자였던 하승균 전 총경은 2003년 펴낸 저서 <화성은 끝나지 않았다>에서 사건과 관련한 괴담을 비판했다. 하 전 총경은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비 오는 날’이라는 설정은 단지 영화상의 추리였음을 분명히 밝힌다. 괜한 선입견 때문에 사건 자체를 잘못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노파심에서 밝혀두는 것”이라며 “사건과 관련된 선입견 중 또 다른 대표적 예가 ‘빨간 옷’을 입은 여자들이 당한다는 낭설이다. 모두 근거가 없는 소문이거나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라고 밝혔다.
케이블 채널 <오시엔>(OCN)은 영화 <곡성>이 예정됐던 20일 0시20분 방송에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편성 변경했다는 점을 공지했다. 이에 한 트위터 이용자는 “용의자가 특정된 것만으로도 기존 편성된 영화를 바꾸면서까지 <살인의 추억>을 다시 봐야 하는 건가”(@forb****)라고 물었다. 범행 수법이 일부 언론을 통해 상세하게 공개되거나, 피해자의 모습으로 알려진 사진이 일부만 모자이크된 채 포털 사이트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커뮤니티 등에선 <살인의 추억>에 묘사된 범인의 특성을 세세하게 언급하며 “예언 적중” “소름”과 같은 반응도 나왔다.
누리꾼들은 피해자와 유가족이 엄연한 사건인 만큼, 사건을 괴담이나 영화의 소재 정도로만 봐선 안 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누리꾼들은 트위터에서 “화성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강간당하고 살해된 사건이다. 사건의 끔찍함과 피해자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을 흥밋거리로 취급하지 말아라”(@*********esse), “누구도 이 사건을 추억으로 여기지 않는다. 수사한 형사가 악몽이라고 한다”(@*****ezou)고 말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두고도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살인자가 범인보다도 당시 국가와 사회였다는 것”이라며 “초동수사만 제대로 했어도 잡을 수 있었는데 독재정권의 정권 정당화 시도인 88올림픽에 많은 인원이 배정되는 바람에 수사가 부실해졌고, 그 와중에 ‘학습’한 범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는 지적과 “사건을 ‘추억’이라는 워딩과 함께 떠오르게 하는 것은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평가가 엇갈렸다.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씨는 “사건을 괴담이라고 말하거나 연쇄살인범을 엄청난 능력을 지닌 치밀한 사람인 것처럼 띄워주는 것은 범죄 예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공소시효 문제나 미제사건의 해결 가능성, 사건 이후 여성 살해나 여성 대상 범죄가 얼마나 개선됐는지 등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 평론가는 이어 “(범행에서) 탈출한 사람이나 유가족이 일상을 살 수 있도록 사회적 보살핌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화평론가 손희정씨도 “시대를 강타했던 사건이기 때문에 흥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부분이 있다”면서도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여성 전반이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 공포심으로 스스로를 단속해왔다는 사실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연결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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