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0.06 18:10 수정 : 2019.10.06 19:04

영화 〈조커〉는 일반 슈퍼히어로물 영화와 달리 외계 괴물도, 슈트 입은 슈퍼히어로도 등장하지 않고 지극히 사실적이다.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이 화장붓으로 자신의 입술에 붉은색 칠을 하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누리집 갈무리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은 허름한 아파트에서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가 사는 곳은 빈부 격차가 심한 1980년대 암울한 도시 고담이다. 아서는 광대 분장을 하고 거리에서 호객하는 일로 벌이를 한다. 왜소하고 사교성이 없어 늘 괴롭힘을 당한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꿈이지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은 심리상담소뿐이다. 하지만 상담사마저 병에 대해 호소하는 아서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조커’로 변한다. 조커는 괴롭힘당하는 아서와 다른 존재다. 조커는 무시와 멸시를 당한다고 느낄 때 상대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범죄자다.

영화 <조커>는 여러 가지 서사를 통해 조커로 변신한 아서에게 당위를 부여한다. 병이 있고 가난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그에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변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조커를 마치 예술가인 것처럼 묘사해 신비화하기도 한다. 고담 시민들은 조커를 지지하고 응원한다. 영화를 본 현실 속 관객들도 고담 시민들과 마찬가지였다. 극장을 빠져나가며 “죽일 만했다, 이해가 된다”고 하거나 “대단하다”고 칭송했다. 나는 여기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영화는 조커에게 범죄를 당한 피해자 이야기는 담고 있지 않다. 물론 조커에 대한 이야기니까 조커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가야 했겠지만, 최소한 피해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장치 정도는 둘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영화는 피해자를 체격 좋은 백인 남성으로 설정해 ‘약자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비난까지 피해가고 있었다.

한 영화평론가도 그런 문제의식을 가졌나보다. 호아킨 피닉스가 최근 <조커>와 관련한 인터뷰 자리를 갑자기 박차고 나가는 일이 있었다. 평론가가 그에게 ‘<조커>가 일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줘 비극적 결과가 생길 가능성을 우려해봤는지’ 질문했을 때였다. 한 시간 뒤 돌아온 그는 “그 질문을 고려해본 적 없다. 놀라고 당황했다”고 말했다. 평론가가 이런 질문을 던진 이유는 배트맨 시리즈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상영된 2012년 미국 콜로라도의 한 영화관에서 20대 청년이 관객들을 향해 최루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12명이 숨지고 60여명이 다쳤다.

그나마 영화 속 허구는 나은 걸까. 최근 검거된 화성연쇄살인사건 범인에 대해 우리는 날마다 단독 보도로 그의 실명과 어릴 적 사진, 성장 과정과 학교생활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증언 등과 같은 세세한 내용을 보고 듣는다. 그를 악마화하는 보도가 주를 이루지만, 어린 시절 성폭력 피해 경험과 아내와의 불화 등을 거론하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설명하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사람의 행동 전체를 한두가지 계기로 단순히 설명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모두 가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정신장애가 있거나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고 해서 그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범죄자의 특성을 연구하는 일은 그 특성을 낳은 사회적 모순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 특성을 통해 범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니다.

범죄자를 이해할 수 없는 예외적 존재로 격상하는 일도 문제다. 범죄를 예술처럼 묘사하거나 범죄자를 악마화하는 일은 살인 같은 중대 범죄를 ‘뭔가 특별한’ 사람이 저지르는 예외적인 일이라고 인식하게 한다. 화성사건 용의자를 두고 손재주가 좋은 재능꾼으로 표현하거나 오랫동안 경찰의 수사를 따돌린 천재라는 식의 보도를 자제해야 하는 까닭이다.

아서의 일기장에는 “내 죽음이 내 삶보다 더 가치 있기를”이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다. 그 어떤 삶보다 가치 있는 죽음이라는 건 없다는 사실이다.

이주빈
24시팀 기자

yes@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겨레 프리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