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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7 17:10 수정 : 2019.10.28 13:00

이정하

전국2팀 기자

이른바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에 대한 2010년 7월22일 대법원의 무죄 판결은 충격이었다. 당시 피고인 4명은 2007년 수원역 근처 고등학교에서 가출 청소년 김아무개(당시 15살)양을 폭행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지만,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경찰이 지적장애 노숙인 2명을 붙잡아 허위자백을 받아 징역 5년의 형이 확정된 상황에서 검찰이 ‘이들이 진범’이라며 내놓은 결과 역시 참혹했다. 이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6명 모두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강압에 의한 자백’만으로 무고한 시민을 범인으로 몬 공권력의 폭력성이 온 세상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 변론을 맡은 국선변호인은 “수사기관이 사회적 약자를 ‘범인’으로 물색해놓고, ‘범인’으로 몰아갔다”며 검경을 향해 날 선 비판을 가했다. 그가 바로 박준영 변호사다.

박 변호사는 최근 재수사에 들어간 화성연쇄살인사건 8차 사건의 피의자 윤아무개(52)씨의 재심 청구 변론을 맡았다. 얄궂게도 화성 8차 사건은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과 많이 닮아 있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씨가 재심을 청구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핵심으로 든 사유 역시 ‘경찰의 혹독한 고문과 강요에 따른 거짓 자백’이다. 경찰이 과거 모방범죄로 결론지은 화성 8차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의 한 가정집에서 13살 초등학생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지금이라도 자백해준 (화성사건 피의자) 이씨가 고맙다. 그가 자백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재조사나 재심 청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윤씨는 지난 26일 수사본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윤씨의 결백이 사실이라면, 이씨는 자신의 청춘을 빼앗은 인물이다. 공권력의 잘못 탓에 무고한 시민이 범죄자에게 감사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이씨는 화성 8차를 포함해 화성연쇄살인사건 10건의 범행이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다. 화성과 수원, 청주(2건)에서 발생한 또 다른 살인사건 4건도 털어놨다. 경찰은 이씨가 자백한 14건 모두 그가 ‘진범’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씨가 ‘수사 기록’에도 없는 구체적인 범행 경위를 털어놓거나 범행 현장의 그림까지 그려가며 설명하는 등 진술의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꼽혀온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범인을 끈질긴 수사로 밝혀낸 것은 경찰의 분명한 성과다. 하지만 그 성과는 부메랑이 돼 고스란히 경찰로 향하고 있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하나씩 밝혀질수록 윤씨의 사례처럼 강압·부실·은폐 수사 등 과거 경찰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영화 <살인의 추억> 포스터 속 문장처럼 당시 경찰의 심정을 잘 반영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이는 늘어나는 화성사건 피해자들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던 온 국민의 마음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여망 속에 경찰은 철저한 분석과 조사보다는 ‘사건부터 털고 보자’는 조급증으로 사건에 임했다. 수사 대상자는 2만1280명, 용의자가 3천명에 이를 정도로 경찰은 마구잡이식 수사를 벌였다. 이들 가운데 최소 4명은 경찰의 강압수사에 따른 억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범인을 잡을 기회도 여러번 있었지만, 경찰은 범인의 혈액형을 비(B)형으로 예단하고 오(O)형인 이씨를 번번이 풀어주는 우를 범했다.

화성사건 수사가 진행될수록 경찰의 과오가 확인되는 형국이지만, 이는 경찰이 거듭날 수 있는 기회다. 과거 수사의 잘못을 명명백백하게 밝히고, 강압수사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이들에게 사죄하는 것이야말로 경찰이 신뢰받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무고한 피해자가 살인자에게 감사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jungha9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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