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압수수색 대응 요령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정당까지 강제해산시켰던 박근혜 정권 시절이었다. 교육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압수수색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영장을 보여달라는 말 정도는 들은 풍월로 했겠지만 영장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몰랐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하는 동안 무엇을 따져야 하는지도 몰랐다. 내 권리를 지킬 의지는 충만했으나 검찰이 가져가는 대로 속수무책 당할 판이었다. 교육을 받고 나서도 내가 두려움이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은 생기지 않았다. 압수수색은 물건을 집어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프라이버시와 생활의 평온을 깨는 인권의 문제다. 그러니 “아내가 몸 상태가 안 좋으니 배려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조국 법무부 장관의 마음은 십분 이해된다. 야당이 주장하는 ‘수사 외압’보다 조국이 말하는 ‘인륜의 문제’라는 게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 인륜, 아무나 못 챙긴다.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들이밀며 누군가의 집으로 쳐들어올 때 검찰과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검찰은커녕 자문을 구할 변호사 연락처 하나 없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거나 당황해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지도 못한다. 만약 조 장관의 말대로라면 인륜도 특권이 되어버린다. 압수수색 당일 조 장관은 “강제수사를 경험한 국민들의 심정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통화 사실이 드러나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는 다르게 말했어야 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하더라도 누구나 두려움 없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욱 힘쓰겠습니다.” 압수수색 절차 자체가 피의자를 제압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검찰이 가진 권한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검찰개혁이라면 더욱 그렇다. 검찰 조사를 두번 받았다. 한번은 고소인이었다.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내가 가지도 않은 곳에서 나를 체포했다고 진술한 경찰을 허위공문서작성죄로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나의 억울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경찰은 수사받지 않았고 기소되지도 않았다. 다른 한번은 피의자였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중 공무집행방해 혐의가 있었다. 나는 기소됐고 이번에도 억울한 건 나였다. 검찰의 권한 분산과 견제를 중심으로 마련된 개혁안은 검찰개혁의 전부가 될 수 없다.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는 것만큼 그 권한이 어떤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 더 많이 이야기돼야 한다. 조 장관과 그 가족을 상대로 검찰이 벌이는 수사를 ‘무리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검찰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면) 흐지부지 끝낼 수 있다. 그걸 우리는 ‘정치 검찰’이라고 비판해왔다. 정치 검찰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검찰이 아니라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권력을 만드는 검찰이다. 검찰의 권력은 ‘무리한 수사’만큼 ‘부실한 수사’로도 만들어진다. 노동자를 겁박한 대가로 기업이 쥐여주는 권력, 여성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나누는 권력, 공안사건을 조작하며 유착하는 권력. ‘정치(하는) 검찰’의 문제는 검찰 권한의 조정만으로 풀 수 없다. 검찰이 유죄라면 불의, 검찰이 무죄라면 정의가 돼버린 사회를 바꿀 때 검찰도 개혁된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검찰을 이용하는 세력과 정치적으로 검찰을 규탄하는 세력 간의 정쟁만 무한반복될 것이다. ‘조국 사태’로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 면면이 드러나고 시민들의 토론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치권은 ‘조국에 대한 검찰수사’에 모든 것을 건 듯 겨루고 있다. 그런데 ‘조국 대 검찰’ 어느 쪽도 우리의 억울함에 답하지 않을 듯하다. 우리 스스로 더 많은 정치의 장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겠지만 달리 답이 없어 보인다. 검찰이 조 장관에게 위법하다고 결론을 내린들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 위법하지 않다고 한들 눈앞에 드러난 불평등 구조를 바꿀 도전이 시작되도록 하는 것. 우리가 빼앗기는 권리가 무엇인지 두루 살피며 우리의 정치를 만들어갈 때, 검찰도 개혁되고 조 장관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다할 성싶다.
칼럼 |
[기고] 누가 우리의 억울함에 답할까 / 미류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압수수색 대응 요령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정당까지 강제해산시켰던 박근혜 정권 시절이었다. 교육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압수수색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영장을 보여달라는 말 정도는 들은 풍월로 했겠지만 영장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 몰랐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하는 동안 무엇을 따져야 하는지도 몰랐다. 내 권리를 지킬 의지는 충만했으나 검찰이 가져가는 대로 속수무책 당할 판이었다. 교육을 받고 나서도 내가 두려움이나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은 생기지 않았다. 압수수색은 물건을 집어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프라이버시와 생활의 평온을 깨는 인권의 문제다. 그러니 “아내가 몸 상태가 안 좋으니 배려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조국 법무부 장관의 마음은 십분 이해된다. 야당이 주장하는 ‘수사 외압’보다 조국이 말하는 ‘인륜의 문제’라는 게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그 인륜, 아무나 못 챙긴다.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들이밀며 누군가의 집으로 쳐들어올 때 검찰과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검찰은커녕 자문을 구할 변호사 연락처 하나 없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거나 당황해서 시키는 대로 하다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지도 못한다. 만약 조 장관의 말대로라면 인륜도 특권이 되어버린다. 압수수색 당일 조 장관은 “강제수사를 경험한 국민들의 심정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통화 사실이 드러나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는 다르게 말했어야 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하더라도 누구나 두려움 없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욱 힘쓰겠습니다.” 압수수색 절차 자체가 피의자를 제압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검찰이 가진 권한이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 검찰개혁이라면 더욱 그렇다. 검찰 조사를 두번 받았다. 한번은 고소인이었다.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내가 가지도 않은 곳에서 나를 체포했다고 진술한 경찰을 허위공문서작성죄로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나의 억울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경찰은 수사받지 않았고 기소되지도 않았다. 다른 한번은 피의자였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중 공무집행방해 혐의가 있었다. 나는 기소됐고 이번에도 억울한 건 나였다. 검찰의 권한 분산과 견제를 중심으로 마련된 개혁안은 검찰개혁의 전부가 될 수 없다. 검찰의 권한을 분산하는 것만큼 그 권한이 어떤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는지 더 많이 이야기돼야 한다. 조 장관과 그 가족을 상대로 검찰이 벌이는 수사를 ‘무리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검찰은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면) 흐지부지 끝낼 수 있다. 그걸 우리는 ‘정치 검찰’이라고 비판해왔다. 정치 검찰은 권력의 눈치를 보는 검찰이 아니라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권력을 만드는 검찰이다. 검찰의 권력은 ‘무리한 수사’만큼 ‘부실한 수사’로도 만들어진다. 노동자를 겁박한 대가로 기업이 쥐여주는 권력, 여성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나누는 권력, 공안사건을 조작하며 유착하는 권력. ‘정치(하는) 검찰’의 문제는 검찰 권한의 조정만으로 풀 수 없다. 검찰이 유죄라면 불의, 검찰이 무죄라면 정의가 돼버린 사회를 바꿀 때 검찰도 개혁된다. 그러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검찰을 이용하는 세력과 정치적으로 검찰을 규탄하는 세력 간의 정쟁만 무한반복될 것이다. ‘조국 사태’로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 면면이 드러나고 시민들의 토론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치권은 ‘조국에 대한 검찰수사’에 모든 것을 건 듯 겨루고 있다. 그런데 ‘조국 대 검찰’ 어느 쪽도 우리의 억울함에 답하지 않을 듯하다. 우리 스스로 더 많은 정치의 장을 만들어내기, 쉽지 않겠지만 달리 답이 없어 보인다. 검찰이 조 장관에게 위법하다고 결론을 내린들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 위법하지 않다고 한들 눈앞에 드러난 불평등 구조를 바꿀 도전이 시작되도록 하는 것. 우리가 빼앗기는 권리가 무엇인지 두루 살피며 우리의 정치를 만들어갈 때, 검찰도 개혁되고 조 장관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다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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