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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5 18:20 수정 : 2019.12.16 09:34

정환봉 ㅣ 24시팀 기자

“과학수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2년 전 한 인터뷰에서 했던 질문이다. “단서를 찾아 범인을 빨리 잡기 위한 것”이라는 뻔한 대답을 예상했다. 하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수사를 잘한다는 것은 범인을 빨리 잡는 것이 아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17년 동안 경찰 프로파일러로 일하면서 1천명이 넘는 범죄자들을 상대한 뒤 퇴직한 권일용 전 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의 대답이었다.

1989년 7월26일 새벽 3시, 과학수사가 ‘쾌거’를 이뤘다. 경찰은 미궁에 빠졌던 화성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용의자를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감별법’으로 찾아 자백을 받았다. 앞서 경찰은 8차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체모를 분석해 범인이 티타늄을 다루는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의심되는 48명의 체모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 의뢰했다. 감정 결과 당시 스물두살 윤아무개씨가 용의자로 특정됐다. 1989년 7월29일치 <동아일보>는 “(윤씨가) 사건 발생 무렵의 행적 조사와 함께 국과수의 감정 결과를 들이대며 7시간 동안 추궁하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며 “최첨단 과학장비를 동원한 과학수사의 중요한 사례로 꼽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동위원소 감별법은 당시 법정에서도 처음으로 인정된다. 1989년 10월23일치 <경향신문>을 보면 10월21일 수원지법은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감별법의 감정 결과가 충분한 증거 능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 쾌거가 사실은 재앙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화성 사건의 진범이 잡히자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이미 20년을 복역한 윤씨는 당시 경찰의 강압에 마지못해 자백했다고 말하고 있다. 검찰은 당시 국과수의 동위원소 감별 결과가 조작됐다고 보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윤씨가 무죄라는 최종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을 경찰, 검찰, 법원으로 이어지는 한국 형사사법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진 사례’로 보기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경찰은 강압수사를 했다. 검찰은 이를 지휘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윤씨의 목소리를 외면한 법원 역시 가해자다.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울한 범인을 만드는 데 과학수사를 사용한 국과수의 과오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최근 검찰이 8차 사건 조작 의혹 수사에 직접 나서면서 윤씨의 억울함을 푸는 일마저 수사권 조정 법안 통과를 앞둔 검·경 갈등에 휘말려 해석되고 있다. 직접 수사에 나서면서 ‘경찰을 믿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 중인 사건에 왜 검찰이 나서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경찰이나 이번 사건의 책임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는지 의문이다.

형사사법체계가 무너지면 가장 큰 피해를 받는 이는 윤씨와 같은 약자들이다.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 1992년 미국 뉴욕의 예시바대학 로스쿨에서는 ‘이노센스 프로젝트’(무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억울하게 유죄를 받은 피고인들의 무죄를 디엔에이(DNA) 검사 등을 통해 밝히는 프로젝트다. 지난 27년 동안 이 프로젝트의 도움으로 무죄가 밝혀진 사람은 모두 198명이다. 이 중 59%인 116명이 흑인이었다. 미국의 흑인 인구가 13% 남짓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억울함마저 불평등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수사권 조정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최근 경찰과 검찰은 고래고기 환부 사건, 김기현 전 울산시장 하명수사 의혹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장외전을 치르고 있다. 양쪽은 상대의 잘못을 들춰내는 동시에 자신들에게 적용된 ‘강압수사’나 ‘정치적 수사’의 혐의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수사를 통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은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수사들이 두 기관의 힘겨루기에 이용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문득 2년 전 인터뷰의 한 대목을 떠올린 것도 지금의 갈등이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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