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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10 13:53 수정 : 2006.07.10 14:11

독도 관련 미 국무부 비밀해제 문건

미 국무부 ‘비밀해제 문건’ 살펴보니…

해류 조사로 다시 불붙은 독도 영유권 분쟁은 한국과 일본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원인을 제공하는 단초의 한자락은 미국에 걸쳐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대일 평화조약까지, 미국의 변화무쌍하고 모호한 태도가 독도분쟁 분출의 토대를 제공했다. 이 시기 승전국 미국은 동북아시아 그림을 새로 그리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독도 평가는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중요했다.

워싱턴 인근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보관된 국무부 비밀해제 문건들을 살펴보면, 미국은 처음엔 독도를 한국에 되돌려주려는 생각을 했다. 이 인식이 갑자기 바뀐 데엔 일본의 로비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 성과에 대한 미국 쪽의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미·일 강화조약안 한국령→일본령 최종안에선 아예 ‘독도’ 언급 빠져
미국 ‘친일관리’ 입김 ‘태도돌변’ 한국 독립투쟁 평가절하도 한몫

한국령→일본령→누락…, 혼란스런 미국 시각= 1951년 연합국과 일본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을 앞두고, 미국 국무부는 수년간 여러 차례 조약 초안을 만들었다. 동아시아 영토경계의 밑그림이 여기서 그려졌다.

그러나 독도 영유권에 관한 조약 초안의 내용은 1949년을 기점으로 확연히 달라진다. 그 이전에 작성된 초안들은 한결같이 ‘일본이 독도를 한국에 반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1947년 3월과 8월에 작성된 평화조약 초안 1장 4조엔 “일본은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와 권원(title)을 포기하고, 울릉도와 독도(리앙쿠르 록), 거문도 등을 포함한 모든 한국 해안 섬들을 포기한다”라고 규정했다. 또 동경 132도40, 북위 37도30을 기점으로 한·일 경계선을 그은 지도를 첨부했다. 독도가 한국영토에 포함돼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시각은 1949년 10월13일 작성된 초안 때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1949년 12월15일 작성된 평화조약 초안에선 갑작스레 독도가 일본 영토로 둔갑한다. 이 초안 2장 제3조엔 “일본 영토는 혼슈, 큐슈, 시코쿠, 홋카이도 등 4개 주요 섬에 쓰시마, 다케시마(리앙쿠르 록-독도를 뜻함), 오키리토, 사도 등을 포괄해 이뤄진다”고 적혀 있다. 졸지에 독도 영유권이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것이 미국 정부의 최종 입장은 아니었다. 국무부 문서들을 살펴보면, 새 초안 이후에도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국무부 내 엇갈린 시각이 여전히 여러 곳에서 표출된다. 특히 1950년 9월 국무부의 앨리슨이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쪽 평화조약 전권대사의 조약 초안을 검토한 뒤 작성한 보고서는 주목할 만하다. 독도를 일본령에 포함시킨 결정이 나중에 분쟁을 불러올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앨리슨은 “(초안의) 새 일본 영토 규정은 충분히 명확한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쓰시마(대마도)와 다케시마(독도)처럼 영유권 분쟁이 있을지 모르는 섬들’을 대표적 사례로 지적했다. 독도뿐 아니라 대마도를 한-일간 분쟁 가능지역으로 꼽은 건 눈에 띄는 대목이다.

1951년에 실제로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선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대목도 사라진다. 조약은 “일본은 한국 독립을 인정하면서 퀠파트(제주도)와 해밀튼 항구(거문도), 다즐렛(울릉도)과 같은 여러 섬을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과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명시했다. 독도가 한국령인지 일본령인지의 언급이 아예 빠진 것이다. 이는 뒷날 한-일간 영유권 분쟁의 출발점이 된다.

그나마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언급이 빠진 게 우리로선 다행일 수 있지만, 이것은 전체적으로 영토 구분을 모호하게 해두려는 일본 쪽 의도가 반영된 결과라고 목포대 정병준 교수(역사문화학부)는 분석했다. 정 교수는 “일본은 한국뿐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경계를 모호하게 둠으로써 나중에 영유권 주장의 발판을 삼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본은 훗날 러시아와는 북방 4개 섬 문제로, 한국과는 독도 문제로, 중국과는 센카쿠열도(조어도) 문제로 영토분쟁을 일으킨다.

왜 미국은 태도를 바꿨나=1949년 초까지 ‘독도의 한국 반환’을 기정사실화하던 미국이 왜 갑자기 독도를 일본령에 포함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까. 이 방향 전환이 결정적으로 독도 영유권 분쟁을 불러왔다.

여기엔 두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국무부 주일정치고문을 지낸 윌리엄 시볼드의 로비 때문이란 게 학계의 정설이다. 시볼드는 아내가 일본인으로 일본에 매료됐던 미국 관리였다. 그는 1949년 11월14일 국무부에 보낸 전문에서 “리앙쿠르 록(독도)을 재고할 것을 건의함. 이 섬에 대한 일본 주장은 오래되고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임. 이 섬에 기상관측소와 레이다기지를 설치하는 안보적 고려가 바람직할 것임”이라는 의견을 냈다. 11월19일 국무장관에게 보낸 문서에서도 독도를 일본령으로 넣을 것을 제안했다.

정병준 교수는 “시볼트의 논리는 일본 외무성 조약국 논리의 복사판이었다. 시볼트의 로비 결과, 1949년 12월에 작성된 국무부의 제6차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초안엔 독도가 일본영토로 포함됐다”고 말했다. 국무부가 시볼트 견해에 쉽게 기울어진 데엔 한국 독립투쟁을 평가절하하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시볼트의 독도 의견이 제출된 시기와 맞물려, 국무부 극동국은 한국이 대일 평화조약에 연합국 일원으로 참여하는 게 바람직한지 검토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1949년 12월에 작성됐다. 미국이 한국의 평화조약 참여를 허용했다면, 독도 영유권 문제는 깨끗하게 정리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고서 결론은 ‘한국 참여가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국무부 극동국은 그 이유로 “한국이 (항일) 무력투쟁을 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 반하는 증거들이 더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국이 대일 무력투쟁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 일원으로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극동국은 또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직된 한반도 밖의 민족주의 단체 대부분은 공식적인 국제사회 승인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내에 거의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만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내 한국 군사력에 한해 통일된 영도력을 가졌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다.

전쟁 이후 맺는 평화조약은 승전국과 패전국의 주고받기 싸움이다. 한국 독립투쟁에 대한 낮은 평가는 미 국무부 내에 ‘독도를 굳이 한국에 되돌려주어야만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을 게 분명하다. 워싱턴/박찬수 특파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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