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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11 17:50 수정 : 2018.06.11 19:08

김이택
논설위원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사건은 사법부에 위기이자 기회다. 법원의 치부가 드러나 위기를 맞고 있지만 불신의 뿌리를 도려낼 수 있다면 신뢰받는 사법부로 거듭나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려면 우선 드러난 잘못부터 ‘법과 양심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2015년 7월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이규진 양형위 상임위원에게 인사모(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를 챙겨보라고 지시했다. 그 뒤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산하 인사모 소속 판사들에 대한 사찰과 조직 와해 시도가 이어졌다. 차성안 판사는 재산신고 내역까지 뒷조사당했다. 지난 2월 서울동부지법이 세월호특별조사위 활동을 방해하려 파견 공무원들에게 동향 파악을 지시한 해양수산부 장차관을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한 데 비춰보면 마찬가지로 형사처벌감이다. 그런데도 특별조사단은 박 처장을 서면조사만 한 채 형사고발 대상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법원 내부에서 블랙리스트 논란이 시작된 지난해 2월20일 새벽 6시50분. 서울중앙지법으로 발령받은 첫날 행정처 심의관 김아무개 판사가 중앙지법엔 출근하지 않고 행정처 자기 방에 나타났다. 8시까지 파일 2만4천여건을 임의로 삭제했다. 시기적으로 보아 증거인멸 혐의가 짙은데도 후속 조처는 없었다.

전국 법원장들은 7일 간담회에서 사법부가 나서 고발·수사의뢰하는 데 반대하면서 ‘근거 없는 재판거래 의혹 제기’를 우려한다고 했다. 그러나 공개된 문건만 봐도 거래의 ‘근거’는 많다. 진실 규명 없이는 재판 불신을 걷어낼 수 없다.

원세훈 사건은 1심에서 파기환송심까지 행정처가 재판부 의중이나 형량까지 미리 알아내 보고하는 등 청와대와 깊이 교감하며 거래하려 한 흔적이 뚜렷하다. 통합진보당 비례 의원의 지위 상실 여부를 가리는 소송에서도 행정처 심의관 주문 내용이 판결문에 담기고 선고 연기 요청도 그대로 반영됐다. 스스로 ‘국정운영 협조 사례’로 꼽은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정지 사건은 원심 결과가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원세훈·전교조 사건 등 사법부가 이니셔티브를 쥔 사건들은 ‘방향’과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문건 내용과도 맞아떨어진다. ‘비에이치(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엔 ‘민감한 정치적 사건 등에서 청와대와 사전 교감을 통해 물밑에서 조율’해왔으나 ‘더이상 그럴 이유가 없다고 명확히 고지’해 압박 카드로 쓰자는 제안이 담겼다. 전에 청와대와 조율한 적이 없다면 이것으로 압박하자는 제안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거래의 유력한 근거다.

소장 판사들이 검찰 수사가 불가피하다고 보는 이유 중 하나는 특조단이 접근하지 못한 자료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전수조사 대신 검색어로 파일을 추출하는 방식을 사용한데다 이 사건의 열쇠를 쥔 이규진 양형위원이 쓰던 컴퓨터는 고장을 이유로 복구하지 못했다. 판사들에 대한 불이익 여부를 가려줄 해외연수 자료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핵심 조사대상인 임종헌 전 차장의 친형이 원장인 연구원의 산하기관에 파일 복구를 의뢰했다는 점도 석연찮다.

이런 한계를 덮어둔 채 국민들에게 ‘재판은 공정하게 했으니 믿어달라’고만 하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번에 새삼 확인된 대법원의 편향성이다. 원세훈 사건의 13 대 0 만장일치 판결만이 아니다. 경제 사건에선 법리뿐 아니라 ‘국가경제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좌익정당은 해산이 당연하며, 진보성향 인사는 대법원에 절대 들어와선 안 된다는 전제가 문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런 문건들이 작성·보고·결재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양승태 대법원의 보수 편향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김명수 대법원’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현직 대법관 13명은 지난 2월 원세훈 재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이를 부인하는 자료를 냈다. 당시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6명도 동참했다. 김명수 대법원도 ‘진실’보다 ‘조직 보호’가 우선인가. 대법관 후보 15명이 포함된 전국 법원장들과 미래의 대법관 후보군인 서울고법의 부장판사들도 사법농단을 파헤치는 데 사실상 반대하고 나섰다. 문건 내용을 보고도 불신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도려내기보다는 ‘대법원 판결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논리에 가담한 셈이다. “대법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양승태식 논리와 다르지 않다. 이런 고위법관들로 ‘김명수 대법원’을 꾸린다면 과연 ‘양승태 대법원’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문건보다 그게 더 걱정스럽다.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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