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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02 18:05 수정 : 2018.07.02 21:28

김이택
논설위원

사법농단 사건 검찰 수사가 난항을 겪고 있다. 대법원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하드디스크 등 자료 제출을 거부한 탓이다. 그럼에도 사법농단 전말을 본의 아니게 꼼꼼히 기록한 법원행정처 문건은 진실을 밝혀줄 어둠 속 등불 같은 존재다. 검찰이 확보한 전체의 1% 미만 수준 문건만으로도 최소한 법관 사찰에 가담한 행정처 실무자들은 법의 심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고 그 정도 수준에서 사건이 마무리된다면 정의롭지도 않고 실체적 진실과도 거리가 멀다.

문건 너머 진실의 열쇠는 양 전 대법원장이 쥐고 있다. 그의 기자회견 요지는 ‘재판 거래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고, 법관 사찰은 ‘있었다면 잘못’이지만 ‘당사자들에게 불이익을 준 적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은 모든 의혹과 무관하다거나 몰랐다는 취지다. 과연 그럴까.

‘양승태 대법원’은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을 와해시키기 위해 연구회 중복가입 금지 조처를 시행하면서 판사들에게 전산국장 명의로 공지를 띄웠다. 행정처 차원의 개입이 불법 소지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조처라는 점에서 이를 보고받은 법원행정처장들도 직권남용의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법원장이 강력 추진하는 상고법원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판사모임 해체를 추진하면서 과연 대법원장에게 보고조차 않았을까. 상식적인 의문이 따른다.

재판거래 의혹도 마찬가지다. 대표적 논란거리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을 보자. ‘대법관 일동’은 ‘누구도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판결이 선고되도록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양 대법원장이 설사 ‘거래’하려 했어도 시스템상 불가능하다는 취지다. 그래야 정상이지만 문건 내용은 이런 주장과 거리가 있다.

행정처 판사들이 1심 때부터 유별나게 챙겨 윗선에 보고한 원세훈 사건 재판 동향이 그대로 청와대에 전달됐고, 결국 우병우 수석 주문대로 ‘신속하게 전원합의체’에서 파기됐다. 재판에 관여해선 안 되는 법원행정처 연구관이 작성한 쟁점보고서가 상고심을 맡은 재판연구관에게 넘겨져 핵심 논리가 판결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판사 출신의 서기호 변호사는 문건 분석 결과 박근혜-양승태 독대 6개월 전부터 행정처가 원세훈 사건을 소재로 삼아 재판거래를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독대 뒤 준비한 ‘사법부의 협력사례’ 문건에서 ‘자유민주주의 수호’ 판결로 꼽은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확인 소송은 판결 시점과 내용까지 행정처가 관여했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을 뿐 아니라 ‘예측불허의 돌출 판결이 선고되지 않도록 청와대와 물밑 조율’ 했다고 고백한 문건까지 존재하는데 ‘재판 거래는 꿈도 꿀 수 없다’는 말을 믿으란 말인가. 문건이 사실과 다르다고 국민을 설득할 책임은 양 전 대법원장과 원세훈 사건 주심이던 민일영 전 대법관에게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자신이 사용하던 컴퓨터를 굳이 디가우싱까지 한 것도 이상하다. 대법원은 고장나거나 수명을 다한 물품을 처리하는 불용품 처리 지침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법원장 컴퓨터가 꼭 이 조건에 해당한다는 근거는 없다. 전원합의체 재판에만 들어가는데다 주심을 맡지 않아 재판 관련 비밀이 컴퓨터에 담길 이유도 별로 없다. 검찰총장과 부처 장차관 컴퓨터도 포맷만 하지 디가우싱하지 않는다. 증거인멸 논란이 이는 건 당연하다.

사건 초기부터 ‘블랙리스트는 없다’며 판사들이 괴담을 만들어냈다고 비난하던 일부 언론들이 최근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판하고 있다. 거짓선동에 불과한 재판거래 의혹을 키워 검찰 수사를 자초했다는 이유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석방한 재판부 파면을 요구한 국민청원을 대법원에 전달한 것만으로도 ‘판사들에 대한 협박’이라던 그 언론들이다. ‘협력’하고 ‘조율’했다는 문건의 고백을 보고도 그러니 어이가 없다. 양 전 대법원장이 침묵으로 버티는 건 이런 응원군을 믿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재판은 신성한 것’이라던 주장은 무너졌고 그가 ‘인생의 전부’라던 법원은 불신의 절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게 그가 강력히 밀어붙인 상고법원에서 비롯된 일이다.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밀고 자기만 살겠다면 당당하지 못하다. 법과 양심에 따라야 하는 재판만 42년 했다는 그다. 양심까지 디가우싱해버린 게 아니라면 최고책임자로서 전말을 밝히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야 마땅하다.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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