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7.23 18:05
수정 : 2018.07.23 19:19
김이택
논설위원
ㄱ씨는 서울대 3학년이던 1977년 유신헌법 철폐 등을 요구하는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구치소에서도 정권 비판을 계속하다 교도관들에게 구타 등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질환을 얻어 지금까지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은 뒤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생활지원금 1억원을 받았다는 이유로 별도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은 재판상 화해로 본다’는 대법원 판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양승태 대법원’이 작성한 문건에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협조 사례’로 꼽은 바로 그 판례들 중 하나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실제 모델로 잘 알려진 정원섭 목사는 15년을 복역한 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 사실이 밝혀져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26억원의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졌다. 이른바 ‘진도간첩단 사건’으로 17년을 복역한 박동운씨도 고문에 의한 사건 조작 사실이 밝혀져 재심 무죄와 함께 17억여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두 사례 모두 대법원이 소송 시효를 민법에 정해진 3년에서 돌연 ‘6개월’로 앞당겨버리는 바람에 날벼락을 맞았다. 이 판례 역시 대법원이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했다고 청와대에 자랑스레 내세운 ‘협조 사례’에 등장한다.
유신 당시 긴급조치로 구속된 학생·시민들은 ㄱ씨처럼 보상금을 받지 않았더라도 대법원의 또다른 정권 ‘협조’ 판례 탓에 줄줄이 국가 상대 소송에서 졌다. ‘대통령은 정치적 책임만 질 뿐 법적 책임은 없다’며 불법 구금까지 합리화해준 판례 때문에 아무 배상도 받지 못했다. 이런 피해자가 학생만 650명, 시민까지 1천명 선에 이른다고 한다.
|
복직 합의 뒤 박수치는 케이티엑스 해고승무원들
|
박근혜 정부의 4대 개혁 가운데서도 특히 ‘노동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는 대법원 판결들은 많은 노동자들을 직장에서 내쫓고 생명까지 앗아갔다. 항소심까지 승소했다 대법원에서 패소한 뒤 그 충격으로 케이티엑스 승무원은 세살짜리 딸을 남겨놓고 세상을 떴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역시 30명의 동료를 떠나보내면서도 버텼으나 대법원은 항소심까지의 승소판결을 손바닥 뒤집듯 바꿔버렸다. 케이티엑스 해고노동자 180명이 12년 만에 복직하기로 했으나 모두 시민들의 관심과 성원 덕일 뿐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할 법원의 역할은 없었다. 오히려 ‘국가 경제발전 최우선’ 운운하며 정부와 사용자 편에서 약자들의 인권과 얼마 되지 않는 배상금마저 빼앗는 데 자신들의 법률 기교를 총동원했다. 승무원 오미선씨는 “배상금 1억원을 물어내라는 가압류 통지에 잠을 못 이뤘다”고 했다. 배상금 절반을 미리 받았던 박동운씨는 이자까지 포함해 11억원을 물어내라는 독촉장에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양승태 대법원’ 시절 문건들이 공개되면서 ‘공정한 재판’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이미 깨졌다. 특히 협조 사례로 예시한 판결들은 국민은 물론 당사자들에게는 더이상 정당성을 갖기 어렵다. 일부 인사들을 형사처벌 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는 힘들다.
검찰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유에스비를 압수하는 등 사법농단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대법원은 핵심 자료 제출을 거부하고 압수수색 영장도 대부분 기각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재판거래의 실체를 밝혀 ‘정부 협조’ 판결들의 재심을 이끌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 대목에서 과거사 사건을 많이 변론해온 김형태 변호사의 해법은 경청할 만하다. ‘김명수 대법원’이 스스로 전원합의체에서 문제 판례들을 변경한다면 결자해지의 의미가 있다. 재판소원을 금지한 헌법재판소법 조항과 문제 판결들을 헌법재판소가 한꺼번에 위헌 결정하는 방안은 헌재도 검토 중이라니 가능성이 좀더 크다. 특히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3년을 임의로 6개월로 앞당겨 정원섭·박동운씨 같은 억울한 피해자를 만든 것은 법 취지에도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미성년 채권자 보호 등에 적용할 ‘시효정지’ 규정을 채무자인 국가를 위해 원용한 것은 법리적으로도 억지에 가까워 위헌 가능성이 크다.
국회가 나서 특별입법을 하든, 대법원이나 헌재가 나서든, 헌법기관들에는 ‘재판거래’의 피해를 치유하고 ‘공정한 재판’ 받을 권리를 되찾아줄 책임이 있다.
riki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