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9.26 17:50
수정 : 2018.09.2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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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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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공작>에는 1997년 12월 한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중국 베이징의 북한 공관에서 평양으로 전문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전문의 상세한 내용은 등장하지 않지만 맥락상 직전 총선 때처럼 판문점 등에서의 총격을 남쪽이 부탁해 왔다는 취지다. 이른바 ‘총풍 사건’이다. 영화에는 여당 의원 둘과 안기부 실장이 북쪽 인사들을 직접 만나 거래를 시도한 것으로 나온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국가정보원은 실제로 이 사건 전모를 확인한 적이 있다. 참석자 면면은 영화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비슷한 요청이 있었던 게 사실이고 평양으로 가는 전문을 감청한 자료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총풍 공작 자체가 대선 전 이미 야당 쪽에 누설돼 미수에 그친데다 강압 수사 논란까지 일어나 사건의 실체는 결국 모호해졌다. 공작 문건 폭로로 수뇌부까지 구속된 북풍 사건과 달리 총풍의 전문 내용은 끝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에 영화가 그 일부를 되살려 놓은 셈이다.
20년 전 이 사건들을 취재하면서 익숙해진 이름들이 얼마 전부터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애국세력을 자임하며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민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며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면서 금단 현상을 일으키는 이들이 적잖다. ‘비핵화는 제자리인데 남북관계는 과속’한다는 정도는 점잖은 편이다. 여전히 ‘위장 평화’라고 깎아내린다.
불과 1년여 전으로 돌아가보면 앞으로 갈 길도 분명해진다.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자 한쪽에선 공격용 무기이니 우리도 전술핵무기를 들여오거나 미국이 선제타격을 해서라도 없애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실제 미 특수부대는 미주리주에서 실전연습까지 했다. 이들 주장대로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굳이 상상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그 반대쪽엔 협상용으로 만든 것이니 결국은 과거처럼 관련국들의 대화와 협상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다행히 올해 초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평창올림픽 참가 신년사 이래 적어도 지금까지 진행 과정을 보면 후자의 전망이 옳았다.
전자를 주장해온 이들은 북-미 정상회담과 평양선언의 비핵화 합의가 나온 뒤에도 여전히 북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유엔의 제재로 경제가 어려워지자 마지못해 응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다. 반대쪽에선 북이 ‘핵 가진 가난’ 대신 ‘핵 없는 발전’ 노선을 택했다고 본다. 체제 보장만 되면 굳이 핵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북이 최종적으로 핵을 포기할 것인지를 지금 시점에서 예단하는 건 무리다. 국민들 판단도 비슷하다. <한국방송>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3%, <에스비에스>에서도 78.5%가 평양 정상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비핵화가 안 될 것’(39%, 한국방송)이라거나 ‘북이 핵을 포기 안 할 것’(49.1%, 에스비에스)이라며 경계는 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비핵화 흐름을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쪽에 한 표다. 올해 초부터 북은 비핵화 약속을 구체화하면서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고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한 데 이어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폐기와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용의도 조건부로 밝혔다. 이미 미군 유해 송환 약속도 지켰다. 무엇보다 우리 대통령이 15만 평양 시민들 앞에서 비핵화 합의에 쐐기를 박은 것은 이 문제가 ‘불가역적’ 단계로 들어섰음을 상징한다. 비핵화는 자기들의 위대한 지도자 동지가 남쪽 대통령과 공개적으로 한 약속이 됐다. 그 어떤 합의서, 문서보다 위력적이다.
이제 공은 다시 트럼프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그는 싱가포르 선언에서 적대관계 청산과 안전보장,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을 약속했다. 한-미 군사훈련 유보한 것 빼놓고는 아직 발걸음이 더디다. 다행히 2차 북-미 정상회담도 “머지않아 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발목을 잡는 건 과거 북핵을 방치했던 미국 내 야당과 반트럼프 노선의 주류 사회다. 이들의 저항을 뚫고 회담에서 ‘비핵화-체제보장’ 맞교환 로드맵의 대강이라도 그려낼 수 있다면 대성공이다.
1년 사이 한반도의 평화·번영으로 가는 길이 어딘지 분명해졌다. 70년 동안 북과 ‘적대적 공존’ 해오며 북풍 공작의 파트너로만 북을 보아온 이들도 이제는 그 길에 동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이택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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