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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07 17:56 수정 : 2018.11.29 17:23

김이택

법과 양심을 입에 달고 사는 판사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필자처럼 이런 의문을 품는 분들은 지난해 나온 한 대법관 퇴임 기념 문집을 읽어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겠다.

‘형형한 눈빛, 강렬한 목소리, 모든 걸 흡수하는 강력한 아우라’ ‘뛰어남과 엄정함 이면에 공존하는 깊고 따뜻한 배려심과 소탈함…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포근한 인간미’ ‘뛰어난 언변…폭넓은 식견…통찰력과 미래 비전’ ‘우리는 그분을 위한 송사를 쓸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118명이 참여한 1648쪽짜리 문집 제4부엔 나뭇잎으로 강을 건너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는 누구 못잖은 찬사가 가득하다. 누구는 그분을 석가여래, 자신은 그 손바닥 위 손오공이라 했고, 누군가는 ‘당대 최고의 법관’이라 칭송했다. 그런 법원 분위기에서 선고까지 끝난 판결문을 고쳐 다시 쓰게 하고, 동료 판사 사찰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법농단 사태의 감춰진 1인치라고 할 만하다.

일찍이 ‘대법관님을 마음속의 등대로 삼지 않고서는 법관으로서의 항해를 제대로 헤쳐나갈 수 없을 것만 같다’고 문집에서 고백했던 판사는 그분을 떠올리며 지난해 법원행정처 컴퓨터 공개 여론이 빗발치던 때 절대 안 된다고 거품 물었을 것이다.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큰일을 해주시길’ 기원하던 판사 역시 곧 법정에 설지 모를 그분들 때문에 ‘직권남용죄를 좁게 해석해야 한다’며 미리 한자락을 깔아놓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법농단 사건을 지켜보며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건 법관사회, 특히 고위법관들의 법관답지 않은 태도였다. 세차례 자체조사 기간 내내 이들은 공용컴퓨터도 열어봐선 안 된다며 끝까지 반대했다. 동료 법관 사찰하고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직접 개입한 물증이 드러난 뒤에도 법원장들은 검찰 수사 자체에 반대했다. 당시 대법원에 없던 사람들까지 들러리 서며 ‘대법관 일동’은 재판거래는 없었다는 입장문을 두차례나 내놓았다.

석가여래 은혜 입은 손오공처럼 인사 수혜자들의 인간적 도리인가, 아니면 법대 아래로 내려다보던 일개 소송 당사자 검찰에 법원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인가. 어떤 쪽이라도 ‘박근혜 정부 협조 사례’ 등등의 문건을 온 국민과 함께 봐놓고도 그러는 건 법에도 양심에도 어긋난다. 결국 국민의 힘으로 진실에 한발짝 다가서게 됐지만 손오공 판사들은 여전히 도처에 즐비하다.

석가여래도 또다른 그들의 우상도 조만간 검찰청사 포토라인에 서야 한다. 전·현직 판사만 100명 가까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상당수 현직 판사도 법정에 설 것이다. 문제는 조사받은 판사들 전체가 사실상의 피고인단이고, 스쳐 지나간 인연까지 따지면 법원 전체가 당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란 점이다.

당장 15일이면 닥칠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사건은 어떻게 할 것인가. 특별재판부 입법은 쉽지 않아 보이고,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미 사건 배당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그렇다면 서울중앙지법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기존의 사무분담위를 활용하거나 별도 위원회에서 연고 없는 판사군을 꾸릴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국민이 재판의 공정성을 믿어주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상급심으로 올라갈수록 첩첩산중이다. 두차례 입장문으로 최고법원에 대한 믿음은 송두리째 흔들려 버렸고 자칭 ‘손오공’ 판사는 여전히 핵심 요직에 버티고 있다. 탄핵 주장까지 나온 권순일 대법관 문제는 본인은 물론 법원 내부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민변 등이 꾸린 사법농단대응시국회의가 공개한 탄핵소추안에는 행정처 차장 시절 ‘청와대를 방문해 강제징용 재판 문제를 논의’했다며 재판독립의 원칙 등 헌법을 위반했다고 돼 있다. 당사자는 부인하지만 의혹을 씻기엔 미흡하다. ‘신영철 사태’가 법원 신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시 곱씹어보기 바란다.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국회의뿐 아니라 일부 판사들도 ‘헌법재판소 해법’에 주목한다. 헌재가 법관 탄핵심판을 통해 좀더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란 취지에서다. 심리 초점은 다르겠지만 법원에 공정한 재판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담겼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지금 법원엔 ‘임종헌 꼬리 자르기’ 선에서 사법농단 사태가 정리되길 기대하는 분위기가 대세다. 실제 그렇게 흘러갈 가능성이 적잖다. 하지만 그런 뒤에도 판사들이 법정에서 법과 양심, 정의를 입에 올릴 수 있을까. 석가여래 손바닥 위 손오공 신세 판사들을 국민은 더는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논설위원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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