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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03 10:16 수정 : 2018.01.03 10:38

2017년 11월 9일 개봉한 영화 <채비>는 아들밖에 모르는 엄마, 엄마밖에 모르는 아들을 담담히 담아낸 영화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살린 것은 과장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잘 전달하는 두 배우의 호연이다. 영화 포스터의 일부. 다음 영화 제공

[미래&과학]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2) 연명의료결정법과 ‘죽음 소식 전하기’

2017년 11월 9일 개봉한 영화 <채비>는 아들밖에 모르는 엄마, 엄마밖에 모르는 아들을 담담히 담아낸 영화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살린 것은 과장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잘 전달하는 두 배우의 호연이다. 영화 포스터의 일부. 다음 영화 제공
익숙한 골목길, 한 청년이 버스에서 내린다.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있는데, 그는 빈손으로 가벼운 춤사위를 선보인다. 아마, 비가 오는 것을 즐거운 일로 느끼는 모양이다. 비닐 우산을 받쳐 들고 뒤따라 내린 엄마는 청년의 모습을 한심한 듯 바라보다가, 청년에게 우산을 씌워주면서 이제 가자고 청년을 채근한다. 모자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카메라 쪽으로 걸어오고, 엄마의 고단한 표정과 청년의 해맑은 얼굴이 대조를 이루며 화면 옆으로 흘러간다. 평생 지적장애인 아들을 돌보며 살아온 애순(고두심 분)과 이제 서른이 된 아들 인규(김성균 분)의 이야기는 집에 돌아온 애순이 창문 틈을 테이프로 봉하면서 불안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렇게, 늦가을에 개봉한 영화 <채비>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줄기처럼 조용히 관객들 마음을 두드린다.

평생 아들과 함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애순은 어느 날 자신이 뇌종양 말기임을 알게 된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손발 저림과 두통은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죽음의 소식을 엄마에게 전한다. 영화는 자신이 없어도 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인규를 준비시켜 나가는 애순의 정성과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냈지만, 큰 굴곡이 없는 이야기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한두 번 등장하다가 조금은 평범하게 끝을 맺는다. 이 정도만 들어도 결말을 모두 다 예상하시리라 믿기에 더 언급하지는 않겠다.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제목,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를 떠올리게 하는 결말을 향하여 엄마와 아들은 서로 분투하며 달려간다. 카메라는 모자의 감정을 소복이 담아낸다. 영화, 참 착하다.

언젠가 헤어질 모두를 위한 ‘채비’…

차분한 영화를 집중해서 보게 된 이유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가족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영화가 풀어가는 방식을 만나게 되면서였다. 애순이 부딪친 이 갈등은 “아이에게 부모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까?”로 다시 이어진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네 가지 시도를 전달한다. 첫째, 친구들과 먼 여행 간다고 말하기. 둘째, 동물의 죽음 장면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죽음을 깨닫게 하기. 셋째, 장례식장에 데리고 가서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넷째, 다른 권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영화 ’채비’. 네이버 영화 제공.
애순의 첫 시도, 친구들과 먼 여행을 간다고 말하기는 인규에게 자립의 동기는 될지언정, 죽음에 관한 적절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여행은 그저 잠깐의 부재일 뿐, 영원한 부재인 죽음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으니까. 인규는 엄마의 여행 동안 자신이 밥을 잘 먹는 것이 엄마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달걀부침을 만드는 법을 배우지만, 곧 엄마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는다. 그런 인규의 모습을 본 애순에게 오히려 걱정이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애순은 아들과 헤어지면서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다음, 애순은 병아리 장수에게 가장 약한 녀석으로 골라달라고 하여, 병아리의 죽음을 보고 인규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제일로 금세 죽을 것 같은 놈으로다가 몇 마리”라고 말하는 애순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해 보인다. 그가 바란 대로 병아리 세 마리 중 두 마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하지만 인규가 그저 “병아리가 움직이지 않아”라고 말할 뿐, 병아리의 죽음에 대해 알지도, 죽음의 의미에 관해 깨닫지도 못하자 애순은 이 방법 또한 실패로 돌아갔음을 깨닫는다.

이어서 애순이 택한 것은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규에게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힌 그는 “곧 다시 입을 테니 입는 방법을 잘 알아둬라”라고 당부하면서 근처 장례식장에 아들을 데리고 간다.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장례식장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아들에게 알려준 애순. 그는 이어 자신 또한 곧 죽을 것이라고 인규에게 말하지만, 인규는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밖으로 뛰쳐나간다. 죽음에 대한 본연적인 공포에 더하여 지나가는 여러 사람의 모습에 당황하여 공황에 빠진 인규는 자신을 찾아 시장길을 내달리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울며 “엄마”를 외쳐 부른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눈물범벅이 된 인규의 얼굴을 잡는다. 공포와 경악 속, 자신을 지탱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밧줄, 언제까지라도 지켜주리라던 부모의 약속을 믿는 그 얼굴. 그 앞에서, 자신이 이제 더는 같이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죽음 말하기: 나쁜 소식 전달 어떻게’

2017년 10월 23일, 연명의료결정법 시범사업이 시작되었다. 더는 치료방법이 없고 환자의 고통을 덜 수도 없는 말기 환자 앞에서, 환자의 고통을 지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이제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인가 하는 논의는 오랜 진통 끝에 존엄사, 안락사 등의 용어를 낳았다. 먼저 존엄사란, 이제는 의학적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환자로 전문의가 판단한 환자가 더 이상의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의학 기술의 발전은, 이전에 자연적으로 사망할 환자의 신체 활동을 연장하는 방법들을 개발해 냈다. 인공호흡기, 인공 영양공급, 심폐 체외 순환 등 여러 장치가 약해진 신체 장기의 기능을 대신하여 환자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고민에 빠졌다. 인간 삶의 가치는, 그 생명의 길이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그가 누리는 삶의 형편과 주변의 인정으로 결정되는가.

2005년 캐런 앤 퀸란의 어머니 줄리아 퀸란이 쓴 회고록. 퀸란 가족은 딸의 사망 이후, 1980년 캐런 앤 퀸란 호스피스를 설립하여 말기 환자들에게 최선의 호스피스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마존 제공.
만약 삶의 길이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면, 또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너무도 큰 고통을 지속시키기만 한다면 환자에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1975년 미국에서 식물인간이 된 딸 캐런 앤 퀸란의 인공호흡기를 떼는 것을 허용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부모의 손을 대법원이 들어준 이후, 현재 미국에서는 환자가 의식이 있어 자신이 의향을 명확하게 밝히는 경우, 또는 의식이 있었을 때 미리 기록한 사전지시의향서가 있거나 건강 관련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대리권자가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그가 동의한 경우 인공호흡기, 인공 영양공급 튜브 등을 제거하는 존엄사는 허용되는 상태이다.

존엄사가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던 인공 장치를 제거하는 수동적인 개념이라면, 안락사는 환자가 삶을 멈출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을 제시하는 능동적인 개념이다. 안락사에는 세 가지, 의사 조력 자살, 자발적 안락사, 비자발적 안락사가 있다. 먼저 의사 조력 자살이란, 환자의 요청으로 의사가 환자에게 생명을 마감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1998년 오리건 주를 시작으로, 현재 6개 주에서 의사 조력 자살을 허용하고 있다. 한편 자발적 안락사는 환자의 요청으로 의사가 직접 환자의 생명을 마감하는 약을 투약하는 것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서 허용하고 있으며, 비자발적 안락사는 환자의 동의가 없는 경우에도 의사가 약을 투약하는 것으로 네덜란드에서 특수한 경우에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상태다.

이 모든 논의에 선행하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 애순이 맞닥뜨린 것처럼, 우리는 자기 죽음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 말이다. 의료윤리에서도 이 “죽음 말하기”의 문제는 안락사 논의와 함께 계속 면면히 이어져 왔으며, 점차 존엄사의 일반적 허용과 의사 조력 자살의 논의가 확장되어 가면서 의료인이 환자에게, 환자가 가족에게 이 ‘나쁜 소식’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예컨대 해당 이슈와 관련하여 고전이 된, 1982년 <건강과 사회행동 학회지>(Journal of Health and Social Behavior)에 클라크와 라베프가 발표한 “죽음 말하기: 나쁜 소식 전달 해결하기”라는 논문은 나쁜 소식을 전달할 때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를 세심히 살핀다. 거리 두기, 전달, 전달된 소식의 “나쁜” 부분 완화하기라는 이전 연구의 나쁜 소식 전달의 틀을 확장한 그들은, 첫째 준비하기, 둘째 전달의 전략 설정하기, 셋째 신호에 반응하기, 넷째 (감정, 상황) 품어주기의 단계를 제시한 바 있다. 이후 여러 교육자의 노력으로 의과대학, 전공의 교육, 계속 교육에도 나쁜 소식 전달하기를 가르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으며, 이를 교육 과정에서 시행하고 있는 학교도 많이 있다. 하지만 최근의 한 포괄적 문헌 고찰 연구에 의하면, 이런 교육이 의과대학 학생과 전문의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1] 이 문제는 여전히 많은 의료인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니, 그 소식의 당사자인 환자는 오죽할까.

연명의료결정법 시범사업에서 큰 어려움을 만들고 있는 것 또한 이 소식 전하기의 문제이다. 한 국내 신문의 기사에서 연명의료에 대한 의료진의 반응을 살펴볼 수 있었다.[2] 한 교수는 “심폐소생술 등 연명의료는 사람을 살리는 행위인데, 의사가 이를 ‘중단해도 될까요?’ 하고 물으라는 것이 우리나라 정서에서 매우 어렵다”라고 말했다. 다른 교수는 “환자에게 연명의료 계획서를 받으려고 해도, 가족들이 말리는 경우가 있다. 의사가 먼저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지만, 우리나라 문화 자체가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를 터부시하다 보니 환자들도 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물론 앞서 살핀 것처럼, 죽음 소식을 알리고 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만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랫동안 어떻게든 목숨을 살리는 것에만 집착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죽은 정승이 산 개만 못하다”라는 오랜 속담은 우리 민족이 죽음에 관해 가지고 있던 태도 하나를 보여준다. 삶의 질보다는, 양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그러다 보니, 다들 죽음에 관해 말하는 것을 꺼린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비참하더라도,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견해 앞에서 환자가 스스로 자기 죽음에 관해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참 힘들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규와 같이, 가족의 고통을, 지인의 슬픔을, 환자의 아픔을 듣기를 포기한다. 남는 것은 연명의료결정법이 환자, 가족, 의료진의 충분한 논의 없이 어느 한쪽의 결정대로 좌우되지 않겠느냐는 회의적인 시각일 뿐. 죽음을 받아들이고 함께 이야기하는 성숙함이 없다면, 연명의료 결정이 과연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함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아들을 다독인 애순은 아들이 자신에게 잘해준다는 이유로 목사를 따른다는 것을 떠올린다. 교회에 인규를 데려간 애순은 “목사 양반”에게 자기 죽음을 잘 좀 설명해달라고, “구라를 좀 쳐달라”고 부탁한다. 목사의 설명에 수긍했는지, 인규는 마음이 편해진 표정으로 엄마와 집으로 돌아온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묻는 애순에게 인규는 천국 가면 다시 만날 수 없고 전화도 비행기도 없지만, 하늘나라에서 엄마가 자신을 계속 보고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한다. 애순이 부탁한 구라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것일까, 아니면 비록 다시는 만날 수 없지만 계속 아들을 지켜볼 것이라는, 부모로서 애끓는 다짐일까.

만약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또는 말기 질환의 고통뿐 더는 내 가족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는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있는 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 정답 없는 물음을 지금 떠올려보는 이유는, 미리 고민해보지 않는다면 같이 이야기 나눌 수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명의료결정법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의 기로인 이 시점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저 다시 고통과 절망에 눈을 감고 회피하는 것일 뿐임이 피부에 와닿기 때문이다. 자기밖에 모르던 아들을 두고 떠나는 애순의 모습에 우리네 삶이 겹쳐지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중요한 죽음이라는 문제를 그동안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고 내버려 둬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환자, 가족, 의료인, 사회, 종교…. 이 모두가 함께 모여,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참고문헌

[1] Alelwani SM, Ahmed YA. Medical training for communication of bad news: A literature review. J Educ Health Promot 2014;3: 51.

[2] 조운. 연명의료법 성공?…“환자와 ‘죽음’ 논하는 문화로”. 메디파나뉴스. 2017년 11월 27일.

http://medipana.com/news/news_viewer.asp?NewsNum=212199&MainKind=A&NewsKind=5&vCount=12&vKind=1

김준혁 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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